소설집에 담긴 다섯편의 이야기는 소재나 배경, 스타일에서 전혀 다르지만 등장인물들이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면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각각의 이야기에서는 죽음, 고갈,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의 느낌이 인물들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핀천은 이러한 상황을 폐쇄회로, 쓰레기 폐기장, 엔트로피, 미국 교외, 묵시록적 종말 등의 메타포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초기 단편들이 결함투성이인 것처럼 말하지만, 이 소설집은 황무지 위의 삶에서 막다른 길에 다다른 현대인의 이야기를 동시대의 새로운 감성으로 그려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라고 평가받는 토머스 핀천은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그는 인문학, 자연과학, 종교, 음모론, 대중문화 등 방대한 분야에서 소재를 취하며, 고급과 저급, 시적이며 지적인 표현과 유희적이며 통속적인 표현을 혼용하고, 본격문학의 형식 말고도 장르문학, 영화, TV, 만화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17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이 작품에서는, 대중문화가 확산되고 냉소주의가 만연한 1980년대 레이건 집권기의 미국에서 히피와 급진주의자 세대가 쇠락해가는 과정을 정치소설과 가족로맨스 형식으로 그린다. 보수화된 미국의 한가운데서 1960년대를 들끓게 한 유토피아를 향한 시도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이용당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