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세계사 공산주의가 존재하는 한 지구상에 평화는 없다. 1917년 10월 에르미타주 궁전 러시아 광장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선동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을 참살하고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리면서 공산주의가 드디어 지구상에 입성했다. 이게 이념의 대결장으로 세계가 두 동강으로 갈라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지구촌의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 되었다. ‘인간의 권리는 저마다 공평하게 누려야한다’는 프랑스의 유물론자 칸트 헤겔의 사회주의 이론을 레닌이 보기 좋게 폭력으로 둔갑시킨 결과다.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세계사 공산주의가 존재하는 한 지구상에 평화는 없다. 1917년 10월 에르미타주 궁전 러시아 광장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선동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을 참살하고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리면서 공산주의가 드디어 지구상에 입성했다. 이게 이념의 대결장으로 세계가 두 동강으로 갈라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지구촌의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 되었다. ‘인간의 권리는 저마다 공평하게 누려야한다’는 프랑스의 유물론자 칸트 헤겔의 사회주의 이론을 레닌이 보기 좋게 폭력으로 둔갑시킨 결과다.
전쟁! 전쟁은 인간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살인마들의 광란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의 불행은 막아야 하고 그 전쟁을 막으려면 절대적인 힘의 대결로만 존재한다.
6.25, 이 땅에 그런 비극은 다시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 실정은 한 번으로 족하다. 기회에 우리 모두 각성하고 단결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한 성숙한 정치로 국력을 초강대국으로 신장시켰으면 좋겠다. 그래서 분단의 원흉들 일본과 중국, 미국과 러시에에 맞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은 묻고 챙길 것은 챙겨 그들로 하여금 통일의 기회를 만들어 내야할 것이다. 분단의 이류를 알고 있으니 책임도 어떻게 져야 하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지 않겠나.
경제는 선진성에 진입했다지만 정치는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오명도 이제 벗어야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정직한 정치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비링이끼리 자루 찟는다’는 말이 있다. 내 욕심 챙기는 해바라기 정치인들 제발 무책임한 짓은 말아주었으면 한다. 통일의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국력이다. 국력만 그들로부터 앞서면 통일은 생각보다 쉽게 올 수 있다. 한 사람이 천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지식경제로 가다보면 우리나라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고 중국을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
우리 다 같이 그렇게 노력했으면 좋겠다. 다시는 일본이나 중국에 침략을 당하지 않는 그런 나라로 말이다. 우리의 국력이 그들 국가를 추월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다.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의 대도시 문화생활에서는 전기와 물만 없어도 살아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바로 한강 물이 그러하다.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운집한 인구가 2천5백여만 명이나 된단다. 그들이 한강 물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 한강 물이 인간의 잘못된 관리로 오염이 된다든지, 관리부실로 수도원이 파괴된다면 그야말로 대혼란을 겪어야 할 일이 아닌가? 어떤 대참사가 닥쳐올지 모르는 일이다. 절실한 바람이지만 한강 물은 우리의 젖줄이다. 생명 줄이기에 그러하다. 누구나 마찬가지 소중하게 관리 보존해야 더불어 공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떠올리며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필자가 어릴 때 이야기다. 동네마다 일본 순사들이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에게 강제로 부역을 강요하는 꼴도 보았고, 강제로 남의 재산을 공출 갈취해가는 꼴도 보았다. 심지어는 광솔(소나무) 기름도 강제로 짜가는 꼴도 보았다. 그런 억압 속에서 감격의 해방을 맞아 마을마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높이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는 모습도 보았으며, 탕정 2·1사태 농민 프락치 반란사건도 보았다. 농구기구를 저마다 들고 지서를 때려 부스고 난 다음 면사무소를 점령 식량을 탈취하겠다는 목적으로 날뛰다가 지서 순경이 발사하는 총탄에 몇 명이 쓰러지자 풍비박산 도망하는 난동도 보았다.
해방은 되었다지만 조국의 산하는 두 동강이가 되어 6·25의 피비린내 나는 슬픈 참사도 보았다. 나라가 가난하다 보니 초근목피로 굶주린 배를 채우는 참혹한 비극과 함께 6·25 때는 부르주아 사상이 농후하다고 생사람 잡아다가 인민재판 즉결처분하는 참혹한 현장도 보았다. 수복 후는 유가족 사람들로 구성된 치안대 사람들에게 끌려가 생매장 당하는 꼴까지 보았다.
이 모두가 약소민족의 설움이요 원인이 아니던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소작인으로 살아오던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죽자 필자의 가정에서는 홀어머니 밑에서 지독한 가난을 면치 못한 채 초등학교 시절 눈 쌓인 산 비탈길을 짚신 발로 학교를 다녀야 했으니 그 고생 오죽했으랴.
오천 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오늘날의 우리 세대가 조국 근대화 경제개발 시대를 맞이했다. 이래서 온 국민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국제적 위상에서 민족적 자존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는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 정치인들의 권력에 대한 갈등구조로 인하여 정치적 부재현상에서 국운이 난파선에 이르매 이점 심히 우려를 아니 할 수 없다 하겠다. 김정은의 핵무기 으름장에 불안전한 안보 상황에서 우리 국민이 살아가야 할 곳은 과연 어디란 말이야. 적화통일이 되면 2천만 명의 민족이 생명을 바치거나 태평양 난파선에서 파도를 헤쳐야 한다고 카톡에 붕붕 뜨니 불안한 마음 어찌 없을까 보냐? 역사가 말해주듯이 국가 권력 구조에서 정치인들의 다툼과 갈등 속에서 내란을 조성 국가 안보를 해치는 경우는 없었으면 좋겠다.
너도나도 민주화를 부르짖는 무리에 의하여 오천 년 역사에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을 겪고 있는 오늘날에 또 어떤 국가적 비운을 맞으려고 극성들을 부리는지 그들이 먼저 각성을 했으면 좋겠다는 필자의 생각으로 이 글을 썼다. 정치가 곧 국민 생활과 직결한다는 사실 정치인들과 강성노조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