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의 급강하로 정릉천 자전거 도로가 눈에 띄게 한산해졌던 지난 겨울의 어느 날, 악조건 속에서도 굳이 위험한 하천가로 내려가 꽁꽁 얼어붙은 냇물을 돌멩이로 두드리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처음엔 의아해서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수초 후 나도 모르게 돌멩이에 머리를 맞은 듯 신선한 충격에 젖어 들게 되었다. 남자야말로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의 후예가 아닐까? 어쩌면 그는 극지방의 빙하코어 같은 자신의 뇌를 두드려 그 안에 웅크린 낡은 가치관을 과감히 깨부수고 있는 걸까?
1.5 킬로그램의 작은 우주로 불리는 인간의 두뇌는 스트레스에서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우울의 늪에 빠져드는 방어기제를 택한다고 한다. 최소한의 에너지와 동선으로 위험에서 멀어지기 위해. 하지만 뇌는 이기적이다. 힘겹게 균형을 유지하기보다는 신호를 무시한 채 우울의 늪에 빠져든 뇌를 쉽게 받아들인다. 즉, 두뇌 속 두 마리 늑대가 벌이는 시소게임에서 승자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평소 뇌에 관한 신비감과 뇌과학 분야에 대한 경외심에 빠져드는 것을 즐기곤 했다. 실제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괴리감으로 지쳐가는 뇌. 중요한 건 균형이다. 어둡고 혼탁한 이 세상. 부디 우울한 영혼들에게 세로토닌의 황홀한 세례가 있기를!
2021년 봄 인디언 체로키족의 두 마리 늑대를 떠올리며
공애린
내 인생의 퍼즐 찾기
자웅동체가 아닌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분석 심리학에 의하면 자신의 반쪽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찾아 헤매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 딱히 반쪽이 아니더라도 인생은 완성을 향한 벅차고도 고단한 퍼즐 찾기와 다른 바 없다. 방황과 탐색의 목마름. 쉽사리 빈 자리를 채우지 못하더라도 미지에의 탐험을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마지막에야 스러져가는 희망 때문이 아닐는지.
또렷이 기억되는 내 삶의 퍼즐 찾기는 꽤 이른 시기에 발현했다. 다섯 살 적, 홀로 사시는 외할머니의 손에 맡겨진 나는 낮 동안 텅 빈 집을 지키며 곧잘 몽상에 잠겼다. 감나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쪽빛 하늘의 설렘,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의 환상, 서서히 물들어 가는 어스름 저녁놀의 신비. 결국, 우주의 미아 신세가 된 듯한 고독감과 공포심으로 울음을 터트렸던 나는 한껏 치장하고 나들이를 했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서야 움츠렸던 등을 펼 수 있었다. 낮 동안 완성하지 못했던 퍼즐 판, 그 공허한 여백은 눈부신 외할머니의 존재로 완성되는 듯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곧잘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절망과 희망, 공포와 안도의 감정이 뒤섞인 저녁 어스름 무렵의 경계선 위를 비틀거리곤 했다.
소설 쓰기는 유년기에 싹을 틔웠던 퍼즐 찾기의 연장선에 있는 듯했다. 금맥을 찾아 헤매는 탄광 속 광부처럼 불안과 의혹, 절망과 도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비록 개와 늑대의 시간만큼이나 모호하고 고독한 작업일지라도 멈출 수 없는 까닭은 어쩌면 찾지 못한 퍼즐 조각을 향한 몸부림일는지도 모른다. 사실 인생의 퍼즐 찾기는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여백 없는 삶의 길목에 권태롭게 널브러진 숨 쉬는 해골들. 완성을 향한 여정을 통해 인간은 존재적 의미를 누릴 수 있다.
흔히들 활자가 있는 곳에 혁명이 있다고들 말한다. 정보파급력이 월등히 높은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힐 만큼 인류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널리 알려져 있던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는 금속활자본의 맏형 같은 대접을 받아 왔고, ‘지난 1000년간 동안의 100대 사건’ 중에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영예의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그와는 달리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 고려 시대의 금속활자본 《직지》는 오랫동안 그 존재조차 묻힌 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동양학 서고에서 뿌연 먼지만 쌓고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서지학자 고 박병선 박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세상에 알려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존하는 금속활자본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지는 퍼즐 그 자체였다. 고려 말에 간행된 직지는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 상권은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쪽을 잃어버린, 미완성의 퍼즐 판과도 같은 직지를 향한 책 사냥꾼들의 추적은 당연지사였고, 소설을 쓰게 된 나 역시 쉽게 매료되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채워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상황은 궁금증과 호기심과 더불어 애간장을 태우기 마련이다.
그동안 직지에 관한 소설이 제법 출간되었으나 대부분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등장시킨 소설 속에 또 하나의 직지에 관한 팩션을 담은 액자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후 직지의 고향 청주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다. 직지만큼이나 청주 역시도 대한민국의 보물이었다. 오래전부터 교육 도시로 알려져 있던 청주는 무심천, 상당산성, 성안길, 우암산, 용두사지철당간 등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적지를 지닌 문화의 도시이기도 했다. 교육과 문화의 도시 청주에서 금속활자본 직지가 탄생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화 타이타닉의 촬영을 앞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어떤 내용인지 묻는 제작사에 “타이타닉 호에서 일어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입니다.”라는 명쾌한 답변을 했다고 한다. 누가 장편 소설 《직지 앤 나비》의 내용을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현존하는 금속활자본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지를 둘러싼 젊은 북러버들의 사랑과 음모, 야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대가 하 수상해서 일 년 가량 출간을 미루었던 직지 소설을 범우사에서 펴내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옥 1층을 고서로 가득 채울 만큼 윤형두 회장님과 윤재민 사장님의 책사랑은 출판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비록 낡고 고루할지언정 옛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책갈피에서 풍기는 소소한 향기를 사랑하는 모든 북러버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또 한 권의 소설책을 세상에 내보낸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 2017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