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글
계절은 변화해서 움추렸던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니 농부는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바쁜 때다. 언제쯤이던가? 시서화(詩書畵)를 지어보겠다는 마음을 가지던 차 2년 전부터 한 컷씩 「경기데일리와 경상매일신문」에 칼럼형식으로 연재를 했다. 선가(禪家)의 분상에서 보면 다 부질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根機)가 각기 다르고 이해하는 점도 각기 다르기에 나는 시·서·화에 골똘하게 되었다. 나는 수행자다. 그간 현존하는 고승대덕들이 법문(法門)을 통해 많은 게송(偈頌)을 읊었지만 스스로의 게송보다는 중국 고승들의 법문을 인용하기가 다반사였다.
일찍이 경남 양산에서 10대 후반에 합천 해인사(海印寺)를 향해 무한정 걷고 또 걸어 출가를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출가란, 집을 떠나고 정든 가족을 버리고 자기마저 버릴 때 진정 출가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강원, 선방 등에서 수행을 익히지만 점차로 스스로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경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야 한다’는 수행의 길이다.
어느 때는 산을 넘고, 어느 때는 물을 건너고 어느 때는 머문다. 다만 진정한 수행은 한 생각을 쉬는 데 있다. 한 생각을 쉬지 못하면 산 넘고 물을 넘는다 해도 도(道)와는 요원하다. 이 한 생각을 쉰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나의 스승 경산스님께서 “너는 금생에 사람노릇 하지 말라” 하신 까닭도 한 생각을 쉬라는 뜻이다. 그 한 생각을 쉬기 위한 노력을 수행자로서 오늘도 계속해나가고 있다. 나의 수행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곤륜(崑崙)에 오르는 그날이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보고 느끼고 체험한 과정을 후인들을 위해 정리한 것이 이번에 보인 『꽃을 드니 미소 짓다』(拈花微笑)이다. 이것이 조사관(祖師關)에 부합해서 나의 수행일지가 야부선사 게송(冶父禪師偈頌)에 “마음에서 사람에게 짐 되지 않으면 얼굴에 부끄럼이 없다.”라 한 그런 수행자로 남는다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강호 제현의 일독을 권하며, 또한 많은 질책을 멀리하지 않겠다.
영일만(迎日灣)에서 제운 합장
인간은 과거를 가지고서 현재를 산다. 현재를 사는 것은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되고 꿈꾸는 행복인지도 모른다.
그간 틈틈이 써 놓았던 ‘시’를 이른 봄에 발포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들 삶에 있어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봄날 시냇물 소리는 여느 때와는 다르다. 꽁꽁 언 인고의 찬 세월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영어(囹圄)의 몸에서부터 해방이 되는 것 같은 것이라 하겠다.
시란 인간의 감성 문을 두드리는 나그네다. 아는 것이 많아도, 반듯하게 잘생겼어도 감성이 메마른 사람은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사람으로 세상에 나왔으면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삶은 참으로 슬플 뿐이다.
그러해서 인간은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늘 행복하기 위해서는 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되돌아보는 자신은 그림자와 같아서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림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들 삶이 아닐까?
나는 문인 승이면서 수행자다. 수행의 문턱에서 깨달음을 향하기도 하고 군생(群生)을 위함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어느 때는 시를 쓰고 어느 때는 그림을 그린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라 여긴다. 마치 지구가 스스로를 위해 자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한 권의 시집을 대하며 마음의 감성과 행복을 향한 한 걸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용문사 說禪堂에서 동안거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