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게
지금 떠나는 것은
가을이지 네가 아니야
계절이 간다고 네가 가겠어
우리를 잊는 것은 세상이지
네가 나를 잊겠어,
내가 너를 잊겠어,
보고 싶다는 말 없어도
구름으로 와서 비로 내리고
아침 해로 떠서 노을로 지며
함께 늘 너
곁에서 숨 쉬고 있으니
삶은 얼마나 많은 이별로 이루어지는가
사랑으로 울면서
얼마나 많은 글을 쓰면 알게 되는지
다 담지 못하는 세상을
이별이 지나가고
사랑이 또 꽃피는 자리에 서서
다시 오는 계절을
새로 탄생하는 풍광과 생명을 바라보고
때로는 혼을 충만하게 채우는 행복감이
삼라만상을 찬란하게 비추다가
사라지면서 고향처럼 기억 속에서 숨을 쉰다
다가오는 어둠은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심연을 잊지 말라고 하는데
언제든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
그 가장자리에서
독백처럼 편지처럼
자신을 다독거리는 위로처럼 쓰는 글들
누군가 읽을 때 그 삶의 표현일 수도 있었으면
열권의 시집을 다시 살피며 여기 뽑은 팔십여 편은
옆에 머무는 정 많은 친구 같아서
그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2024년 여름
강방영
안개마을과 어머님의 마당
고향은 안개와 나무들의 마을이었다. 해묵은 나무들 사이로 안개가 내려앉고, 그 틈새에 사람들과 초가가 있었다. 형제였던 할아버지들의 자손이 세대를 거치며 조금씩 늘어나, 제삿밥을 나누고 명절날도 집마다 돌았다. 대부분 식구는 적고 아주 외로운 집도 있었다. 딸 하나 데리고 사는 과부나 젊은 시절 작은 부인에게 밀려난 할머니, 풍파 후에 자신도 남편 없는 늙은이가 된 그 작은 부인, 그들의 오두막이 나란히 있었다. 귀뚜라미들이 까만 눈으로 올려다보는 축축한 부엌 흙바닥, 모두 보리밥을 먹는데 부모가 일부러 논을 사서 쌀밥을 먹였던 동백나무 아래 집 늦둥이 외아들만 예외였다.
쉬쉬하는 안개의 이야기도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동네 가운데 길옆에 사는 부부는 4·3 때 당한 고문으로 정신이 어정쩡해졌다, 4·3 당시 성담 쌓고 죽창 들고 마을을 지킬 때, 우리 할아버지는 총신으로 가슴을 두들겨 맞아 그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골목 안 집 할머니 등물할 때 보이는 깊은 흉터들은 식량을 내놓으라고 밤중에 달려든 폭도들이 칼로 긁어서 그렇다, 들판에서 소를 훔쳐 잡아먹으며 숨어 살던 총각은 어느 날 홀어머니를 찾아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죽게 했다. 주말마다 시아버지가 도시에 사는 아들의 며느리만 불러서 일을 시켰는데, 그 며느리는 농약 먹고 죽었다. 장모에게 소를 팔라고 해서 돈을 치른 사위가 이르기를 베개 밑에 돈을 놓아서 베고 그 옆에 큰 나대를 두고 주무시라고, 시킨 대로 했던 그 날 저녁 집에 도둑이 침입하고, 놀란 장모가 나대를 휘둘러 쫓아낸 후 딸네 집으로 달려갔는데, 그 밤중에 불이 켜져 있고 손 다친 사위에게 딸이 약을 발라주고 있어서, 그대로 발길 돌려서 집에 왔다. 어떤 사람은 며칠이나 안 보이는 이웃 할머니 행방이 궁금해서 물어보러 그 아들 집에 갔다가 오려는데, 잿막에 모아둔 잿더미 가운데로 흰 옷고름이 살짝 보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의 마당에서 언제나 충만한 밤과 아늑한 낮을 살았다. 지붕은 어두운 산에 안겨서 바닷물처럼 깊은 잠속에 잠겼으며, 들에 나는 산새들처럼 아이들은 햇살과 바람 속에서 놀았다. 하늘에서 시간을 재는 푸른 별들과 가끔 짖는 검둥개가 그들의 수호신이었다. 지네 잡으러 달래 캐러 고사리 꺾으러 산으로 들로 달리던 아이들, 그중에 몇은 마을을 감아 흐르는 내에 물귀신이 홀려서 가버렸다.
며칠을 앓았던 어느 새벽 어머니 옆에서 반쯤 깨어 꿈결인 듯 들었던 노래, 여러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 노래는 멀어지다가 사라졌다. 그 슬프고 간절한 가락이 너무나 궁금하였으나 어머니는 더 자라고 할 뿐 답을 주지 않으셨다. 자라서 생각해 보니 상여를 옮기던 사람들의 노래였던 것 같았다. 마을 뒷동산에 상엿집이 있고 그 옆에는 알록달록 헝겊 조각을 달고 당나무도 서 있었다. 거기 딸기가 아무리 탐스럽게 붉어도 아이들은 다가가서 따는 법이 없었다. 무엇인가 신비하고 무섭고 섬뜩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듯 오싹하여 멀찌감치 돌아서 지나갔다.
옛날 사람도 이야기도 다 사라진 지금, 허물어진 오두막과 베어진 나무들로 풍경도 길도 없어져서 갈 수 없는 곳, 이 세상에서 사라진 그 마을은 하늘 속에 구름숲이나 호수 옆으로 옮겨갔을지 모른다. 안개마을 밖은 죽음이 자주 삶을 후려치는 세상이다. 세상일은 더 빠른 물살로 바위에 부딪히며 급하게 흐르고, 그 물가에 비켜서서 생명의 나무에 잎이 갈리고 꽃이 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 어렵다. 그래도 온 우주를 다 가진 듯 어린아이들은 충만하여서 노래 부르며 새롭게 삶을 씻는다. 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와 밀물처럼 범람하는 작별의 아픔, 칼을 갈며 우는 바람과, 가혹한 어둠에 허황된 조명만 비추는 도시, 그 속에서도 생명은 길을 찾아 나간다.
한때 물러갔던 바다는 죽음으로 되돌아오고, 해안선을 가득 채우는 어둠이 오면 안타까운 작별을 받아들여 보내고 돌아서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안개 속에는 몇천 년 전부터 아이들이 숨죽여 울었고, 묻힌 뼈들이 신음하는 어둠은 그 무엇으로도 밝아지지 않는다. 천 개의 만 개의 바다 문을 열어 흰 갈기 나부끼는 말들을 불러내는 바람처럼, 발을 구르고 하늘을 찢으며 홀로 외치는 고통의 질주 속에서도, 슬픔으로 비 내리는 회색인 날에도 어른이 된 아이는 다시 아이를 데리고 어린 시절을 찾아간다. 어디에 둥지를 틀었든 집을 찾아 날아야 한다. 흐려진 마음이 문 닫고 쓰러져 캄캄한 잠을 청할 때도 어디에서인지 일어나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나의 삶에 연결된 사람들 중에는 불이 되어 삶을 고통으로 달구거나, 돌 같은 가슴과 절벽 같은 완강함으로 뻗어 나가려는 나의 의지를 저지하는 벽 같은 역할도 한다. 절망의 바다로 떨어지는 일도 있지만 반대로 자라나는 기쁨도 만난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나를 기다려 줄 것 같은 사람들은 다시 만나기를 갈망하게 한다. 멀고도 추운 땅, 바람 쓸쓸한 가시덤불 위에 얇은 햇살 구슬프고, 지저귀는 새 한 마리 없이 바닷소리도 없이 바위들이 영생을 되풀이하는 땅, 그곳을 지나고 나면 달빛 푸른 곳 하얀 길 위에 아이들이 놀고, 다시 갈 수 없던 끊어진 길 너머에 다다를 날이 올 것만 같다. 한순간 드러나는 신비한 빛처럼 어느 계곡에서 건너오며 부르는 소리처럼, 돌아가고 다시 돌아가는 꿈속의 마을 그 길에 집들, 어두운 밤도 아니고 환한 대낮 또한 아닌 어떤 시간에 드디어 마중 나올 사람들, 그들과 함께 부르는 노랫가락과 웃음소리로, 울려 퍼지는 햇살 속으로 들어서는 날, 나의 시는 그날을 향해 나가는 춤이며 혼자 부르는 노래이다. 되찾은 안개 마을에는 다시 까마귀와 말똥가리와 꿩과 참새와 오소리와 개와 돼지와 닭들과 뱀과 쥐와 고양이와 삵이 달빛 속에 그림자로 스며들어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놀 것이다.
2024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