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제게 큰 숙제였습니다. 그것은 이중으로 그랬습니다. 먼저 실천적인 이유에 있어서 그러했습니다. 제가 진정한 사랑을 품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저 자신이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푼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제가 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 삶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사랑하긴 했습니다. 열정적으로 살고 순간을 살고 있으니까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것으로 나의 사랑이 충분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숙제의 두 번째 것은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서 사랑에 대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조용히 내 마음을 느껴보려 애쓰면 거기에 사랑에 대한 나의 요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거기에 그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 나를 불쌍히 여기듯이 남도 불쌍히 여기게 되는 측은지심, 운명을 같이할 때 느끼게 될 충족감 등, 이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과제는 아닙니다. 막연한 것들에는 언어를 투입하면 안 됩니다. 더구나 그 막연한 것들이 소중한 것들이면 더욱 안 됩니다. 우리 언어가 고귀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망쳤나요?
따라서 저는 언어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을 통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합니다. 먼저 쓰레기를 철거하는 것이 저의 첫 번째 과제였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있지만 사랑은 아닌 것들을 철거하기로 했습니다. 칸트는 순수 이성을 비판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비판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사랑’을 비판하려 합니다. 그 자체로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에 사랑이 될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냐 아니냐는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떻게’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이기심과 탐욕, 허영과 독선 위에 기초할 때 사랑이라는 미명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일말의 사랑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불꽃을 되살려보려 합니다.
섹스도, 혈연 간의 연도, 남녀 간의 애정도, 모두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단지 이것들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행사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이기심과 집착에 물들어 있는가를. 다행히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것들이 세계에 대한 사랑 가운데 존재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만이 특별히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사랑이듯이 그것도 하나의 사랑일 뿐입니다. 배타적이라면 그것은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독자가 이 책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사랑과 관련해 다른 글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이라고 말해지는 인간 희극에 긍정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내면의 폭로입니다. 여기에 대해 저는 권두언에 마르크스의 말을 통해 이미 말했습니다. 환상과 기만 가운데의 삶은 결국 삶 자체를 망칩니다. 그것은 혼란과 몰락을 부를 뿐입니다. 이것이 저의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