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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황영경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 대한민국 전라북도 장수

최근작
2023년 12월 <미나카이 백화점이 있던 자리>

그 사람, 그 무늬들

19세기 프랑스의 청년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세상의 모든 삶을 다 살아보고 싶다고 목말라했다. 나는 일찍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보고 싶다는 가상스런 꿈을 꾸고는 했다. 내 방이 따로 있을 리 없는 어렸을 적에는 식구들이 잠을 자야 하는 소등의 시간이면 곤혹스러웠다. 낯에 읽었던 책 속의 세계로 자맥질해 가며 긴긴 밤을 견디고는 했다. 잠꼬대도 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몽예(夢?, 잠꼬대)라는 호를 가진 문인(남극관)이 있었다. 지독한 독서광이었던 그는 어렸을 적부터 눈병이 날 정도로 책 읽기를 즐겨 해서 온 집안의 걱정을 샀다. 그의 할아버지(남구만, 숙종 때 문인)까지 나서서 손자의 독서를 경계할 정도였으니. 나 역시도 문제아였다. 책 귀신에 씌었는지, 더디 발달되는 시력 때문에 어머니의 가슴을 철렁하게도 했다. 철이 다 들 무렵까지도 ‘방콕’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배 깔고 엎드려 책만 읽던 맏딸년이 얼마나 밉살스러웠을까마는, 비교적 관대하셨던 어머니께 감사를! 나는 책에 한에서는 아주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여행 중에도 그것을 읽겠다고 머리맡 스탠드의 조도를 낮추기 위해 신문지를 씌워놓고 룸메이트를 힘들게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더 나빠진 시력 때문에 그렇게까지 탐욕스러울 수는 없지만. 내게 활자중독증이라는 병세가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굴러다니는 종이 쪼가리에 박힌 깨알 같은 글자들을 더듬어 읽으면서 허기진 성장의 통증을 스스로 치유했던 모양이다. 외삼촌이 고등학교 졸업 우등상으로 타온 두툼한 『동아새국어사전』이 어느새 내게로 넘어왔을 때(아마 어머니가 친정 나들이에서 집어다 주셨을 것이다), 세상이 언어의 질료로 이루어진 것을 알았다. 먼지처럼 부유하는 말글의 입자들, 그렇거니 세상은 계속 말해져왔고 또 멀리 무궁하게 말해져야만 할 것이다. 도서관의 뒷 서가와 헌책방에서 발견한 고색창연한 서책들 속에서 문(文)을 숭배하다가 미친 선비 유림들, 백척간두의 벼랑으로 기필코 밀고 갔던 그들 필생의 한에 감전된다, 전율한다. 진실은 칼끝에도 펜 끝에도 한 점 묻지 않는다. 현실의 갑갑한 문이 나를 가둘 때 책 속에 열린 여러 겹의 덧문을 자꾸만 밀고 나가면 거기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가 있었다. 책만 한 박물관과 성채가 어디 있으랴. 앞서 간 사람들의 삶의 궤적과 사상, 의식들을 책이라는 물리적 집체가 없었다면 어찌 접할 수 있을까. 그 모든 누군가의 고뇌와 비통으로 태어난 문장들에게 경배를 드릴 수밖에. 하루 두 끼 정도의 구메밥에다 책과 원고지만 주어지면 종일 감옥에 갇혀도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은 적도 있었다. 오로지 읽고 쓰는 일에만 집중해서 살고 싶었고, 앞으로도 또한 그러할 삶을 열망하면 가슴이 뛴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말한다. “이 책을 다 쓰면 내 영적 운명은 다 채워지는 것일 터, 영혼들이 내 빵을 먹을 것이기에.”(『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그렇다, 언젠가 내게도 더 이상의 시력이 허락되지 않을 때, “책! 책!”을 외치며 고요히 또 다른 영역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마지막 꿈을 미리 꿀 때면 황홀한 심사마저 피어오른다, 회심의 미소와 함께. 이게 다 책이 주는 마력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줄 치고 메모하는 습관 때문에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다. 미련이 남은 책장을 넘기면서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과 난필로 적바림해놓은 문장들을 다시 옮겨 적는 일도 내 독서의 방법이다. 정금 같은 문장들을 되새김질하듯 곱씹으면서 내 것으로 가지고 싶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낌없이 나눠 쓰는 공공재여야만 했다. 여기에 수전 손택의 말을 빌려와 추인한다. “책들이 사라진다면 역사도 사라질 것이고, 인간 역시 사라질 것”이라고. 신문 칼럼이라는 지면상의 이유로 경골어류의 등 가시처럼 ‘쎄’고 딱딱했던 얘기들을 다시 매만지면서 가차 없이 버려진 잔가시들과 살점들도 추려서 살려보았다.

아네모네 피쉬

여름내 자주 가는 동네 뒷산에서 아기를 밴 고양이와 만났다. 그늘자리에서 책을 볼 때면 고양이도 내 발치에 누워서 나름 삼매경에 빠지고는 했다. -물론 내 스마트폰에는 아직도 ‘인증샷’이 들어 있다.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고양이의 배를 보면서 나도 같이 태교를 했던가. 고양이의 언어를 모르는 나는 무턱대고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들을 읽어주거나 노자의 『도덕경』 같은 문장들을 외워주었다. 인간의 삿된 친절에는 무심한 듯 늘어진 뱃구레를 부려놓고 한가로이 오수를 즐기는 고양이 임부의 모습이란 방만한 행복의 진경이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시집을 온 어머니는 첫아이인 내 오빠를 배었을 때, 부풀어 오르는 배가 부끄러워서 장에 나갈 때면 대소쿠리로 배를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들은 어머니의 그 말이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는다. 미동도 없이 내 곁에 누워서 혹서의 한때 순간을 같이 했던 그 고양이가 드디어 몸을 풀었다. 아침저녁 오스스한 산바람을 맞으며 고양이와 내가 농언을 나눈다. 내 운동화 뿌리를 핥으며 뒤집어지는 녀석의 배퉁이가 홀쭉해졌고, 대신 앙증스런 여덟 개의 분홍 젖꼭지가 더 도드라졌다. 하, 아니 볼 것을 본 것도 아닌데 괜스레 내 시선이 서늘해졌다. 네 아이들은? 예쁘지, 참 예쁠 거야. 내가 호기심을 보일 때마다 녀석은 새침해진다. 제 아이들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이다. 아마도 저만이 아는 비밀스런 장소에 은닉해 놓았을 테지. -이제 ‘인증샷’ 같은 건 찍지 말자. 너무 오래 묵혀온 말들이다. 소중하고 귀한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들이 떠난 한참 만에 참말들이 마구 쏟아졌다. 그런 것들은 왜 그렇게 언제나 늦게 오는지. 어쩌면 그게 진실의 본얼굴이 아닐까. 아니, 그것마저도 환(幻)은 아닐지……. 이제 꿈속에서조차도 보이지 않는 한 친구. 여기 나오는 애도의 문장들은 결국 나를 위한 비가(悲歌)가 아닐까. 그런데 사실은, 그리 기쁜 일도 없듯이 그리 슬픈 일도 없다. 한마디 말로써 열락(悅樂)에 닿기를 꿈꾼 적이 있었다. 말 속에 갇혀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작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더 지극하게 깊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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