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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심규식

출생:1951년 (황소자리)

최근작
2020년 11월 <우리 시대의 영감님>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

지난 밤 기다리던 좋은 비가 흠뻑 내렸다. 희우(喜雨). 며칠 전 텃밭에 심어놓은 고구마순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고구마 두렁 옆에 심어놓은 감자들도 꽃이 피었다. 상추, 고추, 부추, 쑥갓, 땅 콩, 도라지, 더덕, 들깨, 아욱, 오이, 가지, 토마토, 호박 등도 빗물을 흠씬 빨아올려 생신한 모습이다. 별로 넓지 않은 텃밭이지만 우리 집 엔 두 군데 텃밭이 있고, 우리 부부는 봄부터 가을까지 이 텃밭을 가 꾸며 즐겁다. 그 작은 씨앗에서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이며, 부지런히 자라나는 갖가지 잎이며, 어느 날 수줍은 듯 벌어지는 꽃과 앙증스럽게 매달린 열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텃밭이다. 잠깐 나가서 잡초를 뽑아주고, 상추와 쑥갓을 뜯어다 점심을 먹었다. 소박하나 만 족스런 점심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나의 체험이나 생각을 기록한 것들이다. 자전(自傳)적인 글들이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이런 글을 쓴다는 게 외람되지 않을까 적잖이 망설였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쓸 작정을 한 것 은,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삶 못지않게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삶 또한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의 삶 또한 비범한 사람들의 삶 못지않게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장미나 모란이 그 화사한 자태와 눈부신 색깔로 우리의 사랑을 받지만, 이름 없는 야생화 또한 그 나름의 빛깔과 향기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우리 세대는,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근대적인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격변기를 살아왔다. 해방과 6·25전쟁 직후의 피폐한 상황에서 태어나, 경제 성장과 민주화의 진통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오늘날에 이 르렀다. 좋은 작품을 쓰진 못했지만, 글 쓰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 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간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록해둬야 한다는 부채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글의 내용은 나와 동시대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지니고 있는 체험일 것이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한 나의 아들이나 딸에게는 옛날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의 자식뻘인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앞 세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보여 주는 것도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공자의 말씀에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말이 있다. 있는 그대로 말하되 거짓을 꾸미거나 없었던 일을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또한 공 자가 <춘추(春秋)>를 저술할 때의 엄정한 자세를 ‘춘추필법’이라 한다. 아무리 막강한 권세를 휘두른 황제나 왕이라 해도 잘 한 것은 잘 한 것 으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기술하지 않으면 사서(史書)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창작한다면 그것은 한 편의 작품은 될지언정 이미 사서(史書)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마음에 새긴 말이 바로 ‘술이부작’과 ‘춘추필법’이다. 가능한 한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쓰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한 기록이란 인상주의적이고 단편적이 되게 마련이다. 또한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나르시스적인 존재가 아닌가. 눈살 찌푸리게 하는 자화자찬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웃어넘겨주길 바 란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내 유년 시절의 체험과 농촌 풍경, 학창 시절 정신적 편력과 사색의 궤적, 그리고 우리 시대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나의 생각, 그리고 살아오면서 내 마음에 머물렀다가 간 여러 기억의 편린(片鱗)들이다. 요즈음 쓴 것도 있고 전에 쓴 것도 있다. 두서도 없 고, 정리되지도 않은 글들이지만, 내 삶의 모습을 거칠게나마 조감(鳥瞰)할 수 있어, 나에겐 나름의 의미가 있다. 2019년 여름

망이와 망소이 1

『망이와 망소이』를 펴내며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고려 명종 때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서 천민(賤民) 차별에 항거하여 봉기(蜂起)한 혁명아 형제이다. 나는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이 명학소의 난과 그 주인공 망이와 망소이에 대해 배웠고, 그때 문득 ‘이것은 아주 쓸 만한 소설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민 봉기라니! 그때 막 문학에 눈떴던 나는 망이 형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봉건왕조적 사관(史觀)에 의하면 ‘난(亂)’으로 명명되는 모든 민중 봉기(蜂起), 예컨대 명학소의 난, 만적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란 등이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변혁하려는 혁명(革命)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부정적인 ‘난’과 긍정적인 ‘혁명’으로 달리 이름 매겨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 변혁의 주체는 대다수 이름 없는 민중이지 그 시대를 통치하는 왕이나, 권세가, 장군, 귀족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소유한 기득권을 지키려 할 뿐, 새로운 변혁이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수구세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망이와 망소이는 불합리한 봉건적 계급제도와 인습(因襲)을 타파하려는 민중의 기수(旗手)이자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시저나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로마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나 로빈후드, 망이와 망소이, 전봉준 같은 민중의 지도자가 영웅이라는 뜻이다.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 강의>에서 세계의 역사는 ‘세계정신(WeltGeist)’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간다고 말했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 같은 보편적 가치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차츰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었다는 게 그 한 예이다. 헤겔은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거나, 굴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세계사적 개인’이라 명명했는데, 나는 망이와 망소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1995년 겨울 어느 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우들과 교외(郊外)에 있는 작은 절에 바람을 쐬러 갔다. 우리는 절을 둘러보고 절 밑에 있는 호젓한 주막으로 들어가, 난롯가에서 산나물에 탁배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우리들의 문학으로 옮아갔다. 이렇게 게으르게 몇 글자 끄적거리면서 작가라고 행세해도 되나. 이러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墓碑銘)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가 되지 않겠나. 우리는 준열한 반성을 했다. 그리고 명색이 작가라면 한 달에 원고 100매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인 명칭을 <백매 문학>, 동인지 이름을 <좋은 문학 좋은 동네>로 정하고, 1년에 4권씩 5년간 한시적으로 20 권의 책을 내기로 했다. 5년으로 시한(時限)을 정한 것은 대부분의 문학동인이 의욕적으로 출발하지만 대개 용두사미로 끝나는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는 <좋은 문학 좋은 동네> 창간호부터 그간 준비해 온 『망이와 망소이』를 게재하기 시작하여. 석 달마다 300~350매의 작품을 연재했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또 가끔 단편도 쓰면서 석 달마다 300여 매의 글을 쓰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5년 동안 6천여 매의 글을 써냈다. 5년간 20권의 동인지를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한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거듭했으며, 의식을 잃고 섬망에 빠진 적도, 빈사 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작품을 쓰기는커녕 일상적으로 하던 독서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조금씩 건강이 좋아져서, 다시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어 편의 단편과 자전적(自傳的)수상집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를 쓰면서 예전의 필력을 다시 회복했다. 그리고 끝을 못 마쳤던 『망이와 망소이』에 달려들었다. 그간 나의 눈이 달라졌는지 옛글에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나는 과감하게 옛글을 잘라내기도 하고, 새로 보충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문장을 새로 손보았다. 그리고 뒷부분을 집필하여 드디어 『망이와 망소이』를 완성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언제나 나의 아내였다. 아내는 내가 작품의 초고(草稿)를 완성하면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 보고, 구성과 문장,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지적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교정까지 봐 준다. 이번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아내는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손보는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글 쓰는 일을 혼자 하는 작업이라 하지만, 돌아보면 오랜 기간 많은 분들의 격려와 가르침에 힘입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오랜 동안 함께 문학을 한 <수요문학> <신인문학> <백매문학> 동인 여러분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여름 심규식 삼가 씀.

망이와 망소이 2

『망이와 망소이』를 펴내며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고려 명종 때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서 천민(賤民) 차별에 항거하여 봉기(蜂起)한 혁명아 형제이다. 나는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이 명학소의 난과 그 주인공 망이와 망소이에 대해 배웠고, 그때 문득 ‘이것은 아주 쓸 만한 소설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민 봉기라니! 그때 막 문학에 눈떴던 나는 망이 형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봉건왕조적 사관(史觀)에 의하면 ‘난(亂)’으로 명명되는 모든 민중 봉기(蜂起), 예컨대 명학소의 난, 만적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란 등이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변혁하려는 혁명(革命)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부정적인 ‘난’과 긍정적인 ‘혁명’으로 달리 이름 매겨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 변혁의 주체는 대다수 이름 없는 민중이지 그 시대를 통치하는 왕이나, 권세가, 장군, 귀족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소유한 기득권을 지키려 할 뿐, 새로운 변혁이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수구세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망이와 망소이는 불합리한 봉건적 계급제도와 인습(因襲)을 타파하려는 민중의 기수(旗手)이자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시저나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로마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나 로빈후드, 망이와 망소이, 전봉준 같은 민중의 지도자가 영웅이라는 뜻이다.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 강의>에서 세계의 역사는 ‘세계정신(WeltGeist)’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간다고 말했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 같은 보편적 가치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차츰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었다는 게 그 한 예이다. 헤겔은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거나, 굴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세계사적 개인’이라 명명했는데, 나는 망이와 망소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1995년 겨울 어느 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우들과 교외(郊外)에 있는 작은 절에 바람을 쐬러 갔다. 우리는 절을 둘러보고 절 밑에 있는 호젓한 주막으로 들어가, 난롯가에서 산나물에 탁배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우리들의 문학으로 옮아갔다. 이렇게 게으르게 몇 글자 끄적거리면서 작가라고 행세해도 되나. 이러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墓碑銘)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가 되지 않겠나. 우리는 준열한 반성을 했다. 그리고 명색이 작가라면 한 달에 원고 100매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인 명칭을 <백매 문학>, 동인지 이름을 <좋은 문학 좋은 동네>로 정하고, 1년에 4권씩 5년간 한시적으로 20 권의 책을 내기로 했다. 5년으로 시한(時限)을 정한 것은 대부분의 문학동인이 의욕적으로 출발하지만 대개 용두사미로 끝나는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는 <좋은 문학 좋은 동네> 창간호부터 그간 준비해 온 『망이와 망소이』를 게재하기 시작하여. 석 달마다 300~350매의 작품을 연재했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또 가끔 단편도 쓰면서 석 달마다 300여 매의 글을 쓰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5년 동안 6천여 매의 글을 써냈다. 5년간 20권의 동인지를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한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거듭했으며, 의식을 잃고 섬망에 빠진 적도, 빈사 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작품을 쓰기는커녕 일상적으로 하던 독서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조금씩 건강이 좋아져서, 다시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어 편의 단편과 자전적(自傳的)수상집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를 쓰면서 예전의 필력을 다시 회복했다. 그리고 끝을 못 마쳤던 『망이와 망소이』에 달려들었다. 그간 나의 눈이 달라졌는지 옛글에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나는 과감하게 옛글을 잘라내기도 하고, 새로 보충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문장을 새로 손보았다. 그리고 뒷부분을 집필하여 드디어 『망이와 망소이』를 완성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언제나 나의 아내였다. 아내는 내가 작품의 초고(草稿)를 완성하면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 보고, 구성과 문장,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지적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교정까지 봐 준다. 이번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아내는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손보는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글 쓰는 일을 혼자 하는 작업이라 하지만, 돌아보면 오랜 기간 많은 분들의 격려와 가르침에 힘입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오랜 동안 함께 문학을 한 <수요문학> <신인문학> <백매문학> 동인 여러분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여름 심규식 삼가 씀.

망이와 망소이 3

『망이와 망소이』를 펴내며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고려 명종 때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서 천민(賤民) 차별에 항거하여 봉기(蜂起)한 혁명아 형제이다. 나는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이 명학소의 난과 그 주인공 망이와 망소이에 대해 배웠고, 그때 문득 ‘이것은 아주 쓸 만한 소설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민 봉기라니! 그때 막 문학에 눈떴던 나는 망이 형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봉건왕조적 사관(史觀)에 의하면 ‘난(亂)’으로 명명되는 모든 민중 봉기(蜂起), 예컨대 명학소의 난, 만적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란 등이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변혁하려는 혁명(革命)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부정적인 ‘난’과 긍정적인 ‘혁명’으로 달리 이름 매겨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 변혁의 주체는 대다수 이름 없는 민중이지 그 시대를 통치하는 왕이나, 권세가, 장군, 귀족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소유한 기득권을 지키려 할 뿐, 새로운 변혁이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수구세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망이와 망소이는 불합리한 봉건적 계급제도와 인습(因襲)을 타파하려는 민중의 기수(旗手)이자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시저나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로마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나 로빈후드, 망이와 망소이, 전봉준 같은 민중의 지도자가 영웅이라는 뜻이다.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 강의>에서 세계의 역사는 ‘세계정신(WeltGeist)’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간다고 말했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 같은 보편적 가치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차츰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었다는 게 그 한 예이다. 헤겔은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거나, 굴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세계사적 개인’이라 명명했는데, 나는 망이와 망소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1995년 겨울 어느 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우들과 교외(郊外)에 있는 작은 절에 바람을 쐬러 갔다. 우리는 절을 둘러보고 절 밑에 있는 호젓한 주막으로 들어가, 난롯가에서 산나물에 탁배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우리들의 문학으로 옮아갔다. 이렇게 게으르게 몇 글자 끄적거리면서 작가라고 행세해도 되나. 이러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墓碑銘)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가 되지 않겠나. 우리는 준열한 반성을 했다. 그리고 명색이 작가라면 한 달에 원고 100매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인 명칭을 <백매 문학>, 동인지 이름을 <좋은 문학 좋은 동네>로 정하고, 1년에 4권씩 5년간 한시적으로 20 권의 책을 내기로 했다. 5년으로 시한(時限)을 정한 것은 대부분의 문학동인이 의욕적으로 출발하지만 대개 용두사미로 끝나는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는 <좋은 문학 좋은 동네> 창간호부터 그간 준비해 온 『망이와 망소이』를 게재하기 시작하여. 석 달마다 300~350매의 작품을 연재했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또 가끔 단편도 쓰면서 석 달마다 300여 매의 글을 쓰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5년 동안 6천여 매의 글을 써냈다. 5년간 20권의 동인지를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한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거듭했으며, 의식을 잃고 섬망에 빠진 적도, 빈사 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작품을 쓰기는커녕 일상적으로 하던 독서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조금씩 건강이 좋아져서, 다시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어 편의 단편과 자전적(自傳的)수상집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를 쓰면서 예전의 필력을 다시 회복했다. 그리고 끝을 못 마쳤던 『망이와 망소이』에 달려들었다. 그간 나의 눈이 달라졌는지 옛글에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나는 과감하게 옛글을 잘라내기도 하고, 새로 보충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문장을 새로 손보았다. 그리고 뒷부분을 집필하여 드디어 『망이와 망소이』를 완성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언제나 나의 아내였다. 아내는 내가 작품의 초고(草稿)를 완성하면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 보고, 구성과 문장,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지적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교정까지 봐 준다. 이번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아내는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손보는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글 쓰는 일을 혼자 하는 작업이라 하지만, 돌아보면 오랜 기간 많은 분들의 격려와 가르침에 힘입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오랜 동안 함께 문학을 한 <수요문학> <신인문학> <백매문학> 동인 여러분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여름 심규식 삼가 씀.

망이와 망소이 4

『망이와 망소이』를 펴내며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고려 명종 때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서 천민(賤民) 차별에 항거하여 봉기(蜂起)한 혁명아 형제이다. 나는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이 명학소의 난과 그 주인공 망이와 망소이에 대해 배웠고, 그때 문득 ‘이것은 아주 쓸 만한 소설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민 봉기라니! 그때 막 문학에 눈떴던 나는 망이 형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봉건왕조적 사관(史觀)에 의하면 ‘난(亂)’으로 명명되는 모든 민중 봉기(蜂起), 예컨대 명학소의 난, 만적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란 등이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변혁하려는 혁명(革命)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부정적인 ‘난’과 긍정적인 ‘혁명’으로 달리 이름 매겨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 변혁의 주체는 대다수 이름 없는 민중이지 그 시대를 통치하는 왕이나, 권세가, 장군, 귀족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소유한 기득권을 지키려 할 뿐, 새로운 변혁이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수구세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망이와 망소이는 불합리한 봉건적 계급제도와 인습(因襲)을 타파하려는 민중의 기수(旗手)이자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시저나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로마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나 로빈후드, 망이와 망소이, 전봉준 같은 민중의 지도자가 영웅이라는 뜻이다.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 강의>에서 세계의 역사는 ‘세계정신(WeltGeist)’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간다고 말했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 같은 보편적 가치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차츰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었다는 게 그 한 예이다. 헤겔은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거나, 굴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세계사적 개인’이라 명명했는데, 나는 망이와 망소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1995년 겨울 어느 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우들과 교외(郊外)에 있는 작은 절에 바람을 쐬러 갔다. 우리는 절을 둘러보고 절 밑에 있는 호젓한 주막으로 들어가, 난롯가에서 산나물에 탁배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우리들의 문학으로 옮아갔다. 이렇게 게으르게 몇 글자 끄적거리면서 작가라고 행세해도 되나. 이러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墓碑銘)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가 되지 않겠나. 우리는 준열한 반성을 했다. 그리고 명색이 작가라면 한 달에 원고 100매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인 명칭을 <백매 문학>, 동인지 이름을 <좋은 문학 좋은 동네>로 정하고, 1년에 4권씩 5년간 한시적으로 20 권의 책을 내기로 했다. 5년으로 시한(時限)을 정한 것은 대부분의 문학동인이 의욕적으로 출발하지만 대개 용두사미로 끝나는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는 <좋은 문학 좋은 동네> 창간호부터 그간 준비해 온 『망이와 망소이』를 게재하기 시작하여. 석 달마다 300~350매의 작품을 연재했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또 가끔 단편도 쓰면서 석 달마다 300여 매의 글을 쓰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5년 동안 6천여 매의 글을 써냈다. 5년간 20권의 동인지를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한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거듭했으며, 의식을 잃고 섬망에 빠진 적도, 빈사 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작품을 쓰기는커녕 일상적으로 하던 독서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조금씩 건강이 좋아져서, 다시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어 편의 단편과 자전적(自傳的)수상집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를 쓰면서 예전의 필력을 다시 회복했다. 그리고 끝을 못 마쳤던 『망이와 망소이』에 달려들었다. 그간 나의 눈이 달라졌는지 옛글에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나는 과감하게 옛글을 잘라내기도 하고, 새로 보충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문장을 새로 손보았다. 그리고 뒷부분을 집필하여 드디어 『망이와 망소이』를 완성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언제나 나의 아내였다. 아내는 내가 작품의 초고(草稿)를 완성하면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 보고, 구성과 문장,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지적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교정까지 봐 준다. 이번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아내는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손보는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글 쓰는 일을 혼자 하는 작업이라 하지만, 돌아보면 오랜 기간 많은 분들의 격려와 가르침에 힘입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오랜 동안 함께 문학을 한 <수요문학> <신인문학> <백매문학> 동인 여러분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여름 심규식 삼가 씀.

망이와 망소이 5

『망이와 망소이』를 펴내며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고려 명종 때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서 천민(賤民) 차별에 항거하여 봉기(蜂起)한 혁명아 형제이다. 나는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이 명학소의 난과 그 주인공 망이와 망소이에 대해 배웠고, 그때 문득 ‘이것은 아주 쓸 만한 소설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민 봉기라니! 그때 막 문학에 눈떴던 나는 망이 형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봉건왕조적 사관(史觀)에 의하면 ‘난(亂)’으로 명명되는 모든 민중 봉기(蜂起), 예컨대 명학소의 난, 만적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란 등이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변혁하려는 혁명(革命)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부정적인 ‘난’과 긍정적인 ‘혁명’으로 달리 이름 매겨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 변혁의 주체는 대다수 이름 없는 민중이지 그 시대를 통치하는 왕이나, 권세가, 장군, 귀족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소유한 기득권을 지키려 할 뿐, 새로운 변혁이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수구세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망이와 망소이는 불합리한 봉건적 계급제도와 인습(因襲)을 타파하려는 민중의 기수(旗手)이자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시저나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로마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나 로빈후드, 망이와 망소이, 전봉준 같은 민중의 지도자가 영웅이라는 뜻이다.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 강의>에서 세계의 역사는 ‘세계정신(WeltGeist)’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간다고 말했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 같은 보편적 가치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차츰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었다는 게 그 한 예이다. 헤겔은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거나, 굴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세계사적 개인’이라 명명했는데, 나는 망이와 망소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1995년 겨울 어느 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우들과 교외(郊外)에 있는 작은 절에 바람을 쐬러 갔다. 우리는 절을 둘러보고 절 밑에 있는 호젓한 주막으로 들어가, 난롯가에서 산나물에 탁배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우리들의 문학으로 옮아갔다. 이렇게 게으르게 몇 글자 끄적거리면서 작가라고 행세해도 되나. 이러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墓碑銘)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가 되지 않겠나. 우리는 준열한 반성을 했다. 그리고 명색이 작가라면 한 달에 원고 100매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인 명칭을 <백매 문학>, 동인지 이름을 <좋은 문학 좋은 동네>로 정하고, 1년에 4권씩 5년간 한시적으로 20 권의 책을 내기로 했다. 5년으로 시한(時限)을 정한 것은 대부분의 문학동인이 의욕적으로 출발하지만 대개 용두사미로 끝나는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는 <좋은 문학 좋은 동네> 창간호부터 그간 준비해 온 『망이와 망소이』를 게재하기 시작하여. 석 달마다 300~350매의 작품을 연재했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또 가끔 단편도 쓰면서 석 달마다 300여 매의 글을 쓰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5년 동안 6천여 매의 글을 써냈다. 5년간 20권의 동인지를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한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거듭했으며, 의식을 잃고 섬망에 빠진 적도, 빈사 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작품을 쓰기는커녕 일상적으로 하던 독서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조금씩 건강이 좋아져서, 다시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어 편의 단편과 자전적(自傳的)수상집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를 쓰면서 예전의 필력을 다시 회복했다. 그리고 끝을 못 마쳤던 『망이와 망소이』에 달려들었다. 그간 나의 눈이 달라졌는지 옛글에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나는 과감하게 옛글을 잘라내기도 하고, 새로 보충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문장을 새로 손보았다. 그리고 뒷부분을 집필하여 드디어 『망이와 망소이』를 완성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언제나 나의 아내였다. 아내는 내가 작품의 초고(草稿)를 완성하면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 보고, 구성과 문장,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지적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교정까지 봐 준다. 이번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아내는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손보는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글 쓰는 일을 혼자 하는 작업이라 하지만, 돌아보면 오랜 기간 많은 분들의 격려와 가르침에 힘입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오랜 동안 함께 문학을 한 <수요문학> <신인문학> <백매문학> 동인 여러분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여름 심규식 삼가 씀.

우리 시대의 영감님

직박구리를 지켜보며 한 철 지난 6월 중순쯤 서재 바로 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재 창문을 열고 보니, 창 밖에 서 있는 단풍나무 가지 위에 어떤 놈들이 둥지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단풍나무는 창가에 바로 붙어 있어서, 서재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지경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직박구리 부부가 나뭇가지나 마른 풀잎 등을 물어다가 둥지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직박구리 부부는 마치 아침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이라도 된 듯 이른 아침이면 매일 시끄럽게 울어 나의 잠을 깨웠다. 직박구리는 참새보다 몸집이 약간 크고, 제비처럼 날씬하며, 몸은 전체적으로 회갈색을 띠고 있다. 눈 밑으로 검고 큰 점이 있고, 부리는 붉거나 검은 색이다. 나무 열매나 음식 찌꺼기, 곤충, 채소 등을 먹으며, 겨울이면 남쪽으로 이동하는 놈들도 있으나,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사는 텃새이다. 지난 겨울에도 우리 집 감나무 가지에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몇 개의 홍시를 직박구리가 찍어먹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직박구리가 혹시 인기척에 위험을 느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까 봐 그 후로 아예 창문을 열지 않고, 마당에 나가서도 그쪽으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6월 말 경 직박구리는 4개의 앙증스런 알을 낳았다. 그리고 두어 주일이 지나자 4마리의 직박구리 새끼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직박구리 부부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이느라 열심히 둥지를 드나들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둥지를 내다보면 털도 덜 난 직박구리 새끼들은 커다란 입을 쩍쩍 벌리며 어미가 먹이를 먹여주길 기다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어린 아이들이 모두 다 예쁘고, 청소년들이 그렇게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다. 사람만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 다 귀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애처롭다. 내 집을 찾아온 동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직박구리 새끼 4마리가 아무 탈 없이 자라, 가능하다면 다시 우리 집 나무에 둥지를 틀고 우리 집 식구로 살기를 바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등단하고 작품집도 낸 동료 소설가가 있었다. 나와 나이도 같은 젊은 그가 나는 몹시 부러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절필을 하고 일체의 문학 활동을 하지 않았다. 잠깐 슬럼프가 왔나 했더니, 아예 글쓰기를 포기한 것이다. 한참 후 나는 그에게 이제 작품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가 “어차피 거짓말인데 그깟 거짓말을 위하여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매고 밤잠을 설칠 필요가 뭐 있느냐.”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잠깐 우두망찰, 할 말을 잃었다. 소설에 대한 그의 가치관에 대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설마 작품집까지 낸 그의 소설관이 그럴 리가 있을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그가 소설에 대한 그의 가치관 때문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과정의 너무 힘든 고통 때문에 소설을 그만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애써 창작한 작품이 별 주목도 받지 못하고, 또 현실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별 도움도 못 되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 나는 소설이란 것에 가치를 두고 근 50년 소설을 써 왔으나, 세인이 놀랄 만한 문제작이나 역사에 남을 대작을 써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소설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소설을 짝사랑하고 있으니, 이 또한 타고난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나는 앞으로도 힘 닿는 대로 작품을 쓰려 한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어서도 내가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음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그간 가족들과 스승님들, 동학, 후배 여러분의 사랑과 가르침, 배려에 힘입어 오늘의 내가 있음을 새삼 느끼며,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초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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