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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안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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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해바라기 머리와 저녁 발자국>

고래詩, 생명의 은유

고래, 그 불꽃이 생명의 바다에 불타오르길… 7·80년대에 청년 시절을 살았던 세대들이면 누구라 없이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던 송창식의 「고래사냥」1)에 등장하는 “고래”는 그야말로 당대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자리한 청운의 푸른 꿈과 고뇌를 상징했고, 시인 정호승은 「고래를 위하여」에서 “마음속에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실의 동해 울산바다 생태계에서는 그 시절, 북방긴수염고래, 귀신고래, 대왕고래, 향유고래 등 대형 고래들이 그동안의 무수한 남획에 거의 멸종되다시피 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국제포경위원회(IWC)는 1986년부터 상업포경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삶의 위기가 대형 고래는 물론이고, 우리네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의 생존으로까지 그 절박함이 확산되어 한국 현대문학 전면에서 환경시나 생명시의 모습으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이다.2) 그로부터 다시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생명시의 하위 분류라 할 수 있는 일군의 “고래시”가 비로소 현대시의 일각에서 의미 있는 모습으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이 글에서 앞으로 필자가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이런 저간의 고래시의 제 양상을 개략적으로나마 분석하고 종합·정리를 시도하는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고래시의 현실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약간의 보탬이 될까해서이다. 그런데 우리 시에서 고래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고래시에 대한 정치한 정의는 아직 없다. 따라서 우선 성기게나마 고래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언급이 순서일 듯하다. 일차적으로는 고래를 대상으로 쓰인 시문학 또는 고래가 작품의 주제로 다루어진 시문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실제 작품들을 살펴본 결과 고래와 관련이 깊은 울산의 장생포, 고래와 한반도인들의 역사적 시원성을 증명해주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 포경선, 포경과 관련된 직·간접 체험 등과 연관하여 창작된 상당수의 작품들이 흘러 나가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범주에다, 고래를 작품의 중심 이미지나 중심 소재로 다루거나 고래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장소나 체험 등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외연을 넓혀 “고래시”로 정의한다. 이 글에서 주로 다룰 작품들은 필자의 현실적 처지와 한계를 고려하여 《울산작가2005》(2004년 제4호)3)와, 제57차 국제포경위원회 울산회의 기념시집 『고래의 노래』(문학사상, 2005)4), 제1회 고래의 날 기념 109인 사화집 『울산바다 고래봐라』(푸른고래, 2009)5), 《고래와 문학》(2010년 여름·창간호)6), 《고래와 문학》(2013년 봄·통권3호)7) 등에 실린 고래시들을 중심으로 하며, 미처 다루지 못한 고래시들은 다른 기회로 돌린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필요할 경우에는 그 외의 책에 실린 일부 작품들도 범위에 넣는다. 고래시에 대해 최초로 관심을 보인 평론가는 《울산작가2005》 특집에서 “詩 속에 나타난 고래 이미지”를 쓴 남송우이다. 그는 여기서 허먼 멜빌의 『백경』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며 문학에서 고래가 공포와 절망, 암흑과 지옥 등 부정적 이미지로 먼저 그려졌음을 언급한다. 또한 정일근의 「울산의 봄」을 통해서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홍수진의 「반구대 고래 암각화·2」에서는 원시적 생명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안도현의 「고래를 기다리며」, 전홍준의 「금정산」 등등을 거론하며 한국현대시에서 보이는 고래 이미지는 인간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지향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이미지의 한 주체이며, 그리움의 대상으로 노래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남송우보다 좀더 넓은 범위에서 체계적으로 고래시를 다룬 이들은 김성곤·알렉 고든 교수와 구모룡 평론가 등이다. 김성곤·알렉 고든은 『고래의 노래』(문학사상, 2005) 작품 해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바다의 도덕률 사이에서”를 통해 “한국의 시인들은 심해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 그리고 이제는 우리를 떠나가 버린, 그래서 우리가 상실한 고래가 과연 현대인의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각기 다른 시각과 목소리로 천착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고래를 첫째 평생 추구하는 낭만적 꿈, 둘째 인간 존재의 상징적 은유, 셋째 인간이 상실한 목가적 이상(理想), 넷째 인간이 지켜야할 생태계의 마지막 보루, 다섯째 예술적으로 형상화되어 우리의 삶과 사회를 성찰하는 좋은 모티프, 여섯째 우리가 추구하는 비전과 이상의 은유, 일곱째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인생의 신비한 수수께끼, 끝으로 여덟 번째 하염없는 기다림과 강렬한 그리움의 대상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한편 구모룡은 지난 2010년 6월, 정일근 시인이 주도하는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에서 발행한 《고래와 문학》 창간호, 특집 「2010 고래의 날 기념 고래문학 세미나」의 발제문 「고래, 생명과 희망의 시적 지평」에서 “고래시의 시적 지평은 1)반구대 암각화를 매개로 시원과 야성을 지향하는 것 2)동해바다 고래를 청춘의 꿈과 상처의 표상으로 상상하는 것 3)고래를 사랑과 생명과 평화의 이미지로 그려 미래 지향적 비전과 결부하는 것 4)구체적인 장소인 장생포의 역사와 그것의 재탄생과 연관시키는 것” 등으로 분류해 구체적인 해당 작품들과 함께 자세하게 접근했다. 이 외에도 고운기, 서철원 등은 삼국유사 등 과거의 문헌에 나타나는 “드센 고래로서의 왜(倭)”8)에 대한 인식을 진지하게 논의했으며, 시인 김종경, 김만수, 안성길 등도 나름의 고래시에 대한 인식9)을 보였다. 특히 김종경은 발제자 구모룡의 고래시에 대한 네 분류를 전부 수용하면서도 더욱 많은 고래시의 생산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네 가지 정도의 조건”10)이 더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안성길은 한국현대 고래시의 대표적 작가라 할 수 있는 정일근의 “고래 이미지를 다룬 시” 10여 편을 집중 분석하여 일정한 성과11)를 보이기도 했다. 이상의 기존 성과들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고래시의 양상”은 앞서 확보한 텍스트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크게 여섯 갈래 정도의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이 책에서는 첫째, 작품이 다루고 있는 중심소재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위해 반구대, 장생포 등 공간과 고래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본다. 이어서 둘째로 생태·생명시의 하위 분류인 한국 현대의 고래시가 중심소재인 고래를 이미지의 측면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는가를 접근해 보고, 셋째, 중심소재인 “고래”와 “포경”에 대한 작가들의 인식의 제 양상을 살펴보고, 넷째, 고래시에 대표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주제적 측면을 접근해 보고, 다섯째, 고래시를 그 형상화 방법과 표현기법의 시각에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는 “귀신고래”에 대한 여러 시인들의 인식 양상 등의 순서로 살핀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을 처음에는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고래시의 양상”으로 붙였으나 출판을 위한 편집과정에서, 대개의 논문이나 평론들에서 보이는 학문적 딱딱함이 문제로 지적되어 그를 누그러뜨리는 여러 논의 끝에 “고래詩, 생명의 은유”로 바꾸게 되었다. 이 글이 처음 발표된 매체는 지난 2014년 4월 25일 발행된 《고래와 문학》(2014, 봄·통권4호)이다. 울산광역시가 매년 4월 25일을 “고래의 날”로 제정한 사실에 맞춘 것이다. 이때는 고래시의 공간과 이미지 등 주로 글의 앞부분이 담겼고, 이듬해에 나온 《고래와 문학》(2015, 여름·통권5호)에 그 나머지가 발표되었다. 이후 《海洋과 文學》, 《문학울산》 등 문예지에 각 챕터별로 집필하면서 완성된 내용의 일부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들 원고를 최종 수정 종합한 원고가 2017년 울산문화재단으로부터 창작기금 수혜대상으로 선정됨에 따라 비로소 평론집으로 출간되기에 이른 것이니 울산문화재단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졸고를 흔쾌히 맡아준 도서출판 푸른고래의 오창헌 대표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민달팽이의 노래

한때 눈 안에 고여 드는 모든 것들 뜨거운 숨비소리에 가슴 벅차 시 쓰기 시작했다. 허나 많은 날들 그 아름다운 순간 놓아버리고 살았다. 불명의 외로움에 시달리던 어느 날, 몸이 이 별에서의 마지막 종소리 듣고서야 허겁지겁 되찾아 헤맨다. 부디 한 소절이라도 온전히 베껴 적었기를…… 언제나 빈사인 나, 그런 나의 언덕, 아내 심말선 고맙다. 2018년 어느 가을날 달천철장 서재에서

지역문학, 그 날것의 미학

지역문학, 그 날것의 미학 흔히 평론은 문학 텍스트의 비판적 읽기라 한다. 그런 읽기의 목적은 텍스트가 놓여있는 맥락을 읽어내고, 즉 그것이 왜 여기 놓였는가? 혹은 저기 두었는가? 하는 의도를 앞뒤 좌우 위아래와 시대 등을 고려하여 파악하고 가치매김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얻어진 작가론이나 작품분석 내용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성찰을 통해 “지금 여기”를 인식하고, 주어진 삶 “그 너머”를 짚어보는 행위라 하겠다. 서울대 김성곤 교수 또한 어느 심사평에서 평론은 “모름지기 작가나 작품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동시대의 정신을 파악하고, 당대의 문제점들과 씨름하며, 미래의 전망까지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동아신춘문예 2000)고 적시한 바 있는데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 덧붙여 강조한다면 대상 문학 텍스트로 접근하는 수많은 여러 갈래 길 가운데 평론은 그 하나일 뿐이며, 가능하다면 그 길이 많이 즐거웠으면 한다는 거다. 이 평론집의 서명書名에 “날것”은 주로 시류와 손익에 오염되지 않은, 매우 질박하고 수수한 “진정성”과 관계가 깊다. 또한 “지역문학”을 앞세운 것은 대상 텍스트를 다루는 필자의 핵심 시각이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가장 개성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등등의 기치 아래 “돌산 갓김치, 김치, 파전, 한식 밥상, 전통 탈춤(고성 오광대, 하회 탈놀이), 판소리” 등에 집착한 바 있다. 물론 7,80년대에도 그런 흐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주된 배경에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90년대의 “세계화” 광풍과 함께 불어닥친 “신토불이”란 범 정부주도의 다소 전체주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모든 게 세계화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 갈 때, 주체성을 견지한 채 살아남는 경쟁력의 획득과 확보가 자칫 “우리 것이 최고여!”라는 국수주의로 오인되는 부작용을 양산하기도 했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2000년대도 그 초중반을 향하고 있다. 이 와중에 문학에 있어 표절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 출판계에 돌풍을 몰고 와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았고,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노벨문학상”에 버금가는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인 “맨부커 상”을 수상한 데 이어 최근 또다시 소설 『흰』이 “맨부커 상” 후보에 올라 화제다. 여기에 더해 원로 문인 황석영의 『해 질 무렵』도 “맨부커 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후보로 선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한편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류의 중심인 K-Pop가수들의 대표적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BLACKPINK, 트와이스TWICE 등과 저 K-Pop 선두주자였던 「강남스타일」의 싸이PSY 등은 때마침 대두된 글로벌 네트워크와 함께 성장해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성과가 과거의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란 인식에 따른 결과적 경험과 딱히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필자의 판단으로는 적어도 무관하진 않겠지만, 지금 그들의 예술세계는 발상의 일대 전환을 바탕으로 세계적 흐름을 포용한 속에 혼신으로 피땀 어린 완성도를 드높인 결과가 아닐까 한다. 이쯤에서 다시 앞서의 “지역문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를 필자의 핵심 시각으로 앞으로의 대상 텍스트를 대하는 것은 문학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우리네 삶을 되살피고 고양하는 것이며, 또한 필자는 모든 삶의 구체성은 지역적일 때 온전히 성립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시스템의 작동구조와 성격에 철저히 연동되어 있다고 본다. 해서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지역과 지역으로서의 울산의 현재와 과거를 살피고, 최근에 나타났던 지역문학운동, 울산의 해양문학, 장생포, 고래 등을 통해 울산적인 삶이 문학작품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먼저 가늠해 본다. 그 뒤엔 지역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인 서덕출 시인을 좀 더 세밀하게 접근한 글 등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일별한다. 그 뒤엔 지역의 개별 작가들의 작품집을 다룬 글을 주로 배치하여 그 작품세계의 결을 다소 거칠게나마 더듬고 맛보기로 한다. 여기서 우리 문학 판의 실상 파악을 위한 전제로 그 바탕인 사회의 본질을 잠시 살핀다. 오늘날과 같은 민주시민사회의 핵심 가치는 단적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이다. 우리네 삶의 모든 영역은 그것의 커다란 자장 안에서 실현될 때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중세 봉건 국가와 근세 절대주의 국가의 붕괴 후 성립한 근대국가는 법치주의 아래 인간의 자유와 평등, 기본권의 보장, 의회 정치 등이 특징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두드러진 점은 통치 기구의 중앙 집권성일 것이다.(표준국어대사전) 이 통치 기구의 중앙 집권성은 한 사회 혹은 집단의 위계적 질서체계를 강화시킨다. 이는 일사분란과 총화단결, 효율의 극대화란 측면에선 그 사회 혹은 집단의 경쟁력과 생존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는 후에 효율과 이윤의 극대화를 마구 추구하는 시장경제 곧 자본제 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수많은 문제점을 양산했다. 컨트롤 불능의 광적인 물신숭배의 팽배, 몰개성, 부의 극심한 편중과 불평등한 분배, 비민주적 혹은 반민주적 사회 일상 등 이들로 기인한 인간소외 현상Human alienation phenomenon, 그런 결과로서의 인간성 말살과 비인간적 삶의 만연은 그 누구도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결과이다. 사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의 가속적인 심화과정에서 무기력하게 훼손된, 인간의 자유와 평등, 개성과 다양성, 다름과 차이의 인정, 협력과 상생, 열림과 포용 등의 회복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인 참된 민주주의의 구현과 지방자치제를 통한 지방분권의 실시 요구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점점 자주 목격되곤 했고, 마침내 군부독재가 종식되던 무렵, 대외적으로도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 이념 대립 또한 일단의 종언을 고했다. 바로 이 무렵인 1991년, 우리 지방자치제는 기적같이 다시 부활했다. 이 지방자치제는 해방이후인 1948년 헌법에 곧바로 명문화되었지만 국가의 불안정 등 여러 이유로 계속 유보되었던 것이다. 허나 부활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중앙 집권적이었다. 그것은 중앙 집권적인 행·재정 제도가 지방 자치 단체의 권한과 자원을 인정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난 노무현 대통령 대에 와서야 지방 분권이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실행되었다. 지방 분권의 핵심은 사무의 합리적 재배분과 재정 분권이다. 재정 분권 없는 지방 자치는 속 빈 강정일 뿐인데, 당시 중앙 행정권과 지방 분권은 ‘8:2’에 불과했고, 지금도 큰 변화는 없다.(조충영, “지방분권해야 민주주의 발전한다”, 국제신문, 2018. 02. 26. 30면 참조) 그런데 최근 유행처럼 회자되는 풀뿌리 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는 평범한 지역주민들이 지방의회의 예산을 계획하고 실시하는 일에 참여하는(예: 지역참여예산제) 등 지역 공동체와 실생활의 변화를 꾀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하나란 점에서는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혔지만 중앙 행정권과 지방 분권의 극심한 기울기를 보면 특히 그 재정 자립도를 감안하면 중앙 정부에의 종속성이 별반 개선되지 않아 요란한 깡통처럼 실속은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몸담고 소중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사회 시스템의 구조에 대해 살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중앙과 지방”이란 대립과 종속구조이다. 정치와 행정 측면에서의 이 같은 “대립과 종속” 행태는 그 모양 그대로 문화와 교육 등에도 연장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폐해의 해결책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민주주의의 온전한 구현과 지방자치제를 통한 지방분권의 실현이다. 그 결과 문학 판에서는 “중앙”의 수직·종속 개념인 “지방”은 폐기되고 수평·동등 개념인 “지역”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즉 모두가 “지역”인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여전히 힘이 센 “중앙”이 존재한다. 이를 통렬하게 직시한 장정일의 「중앙과 나」를 보자. 그는 [중앙]과 가까운 사람 / 항상 그는 / 그것을 [중앙]에 보고하겠소 / 그것을 [중앙]이 주시하고 있소 / 그것은 [중앙]이 금지했소 / 그것은 [중앙]이 좋아하지 않소 / 그것은 [중앙]과 노선이 다르오 / 라고 말한다 // [중앙]이 어딘가 / [중앙]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중앙]으로부터 / 임명을 받았다는 이자의 정체는 또 무언가? / [중앙]을 들먹이는 그 때문에 / 자꾸 [중앙]이 두려워 진다 //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아주 먼 곳에 / [중앙]이 있다고 / 명령은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아주 / 높은 곳에서부터 온다고 그는 말한다 // 그리고 이번 근무가 잘 끝나면 / 나도 [중앙]으로 간다고 / 그는 꿈꾼다 // 그러나 십년 세월이 가도 / [중앙]은 그를 부르지 않는다 / 백년 세월이 그냥 흘러도 / [중앙]은 그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 [중앙]은 왜 그를 부르지 않는가? / [중앙]은 왜 그를 기억하지 않는가? -장정일, 「중앙과 나」 전문1) 도대체 무소불위, 정체불명, 안하무인의 저 “[중앙]”은 어디이고 누가 만든 것일까? 모든 지역에서 제각각의 삶과 그것을 평생 붙들고 씨름하고 고뇌하는 지역 작가들이 그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는 길은 무엇일까?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결국 개별적이든 집단적이든 작가의 참으로 치열한 작품 창작을 통해 해소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역의 모든 작가는 그의 몸과 정신이 놓인 곳의 지역적 특색인 향토성과 작가의 개성이 대립이 아닌 상호 침투와 융합을 통한 작가적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이끌어낼 때 비로소 심미적 보편성과 감동이 획득 가능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항시 블라인드 뒤에 있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대 힘의 “[중앙]”도 끊어낼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 담긴 대다수 울산지역 작가와 그 작품들을 바로 그와 같은 시각을 견지하려 노력하면서 읽기와 감상에 몰입했던 것이고, 그런 결과로써의 생각들을 비록 능력 부족으로 많이 거칠긴 하지만 여기에 펼쳐 보인다. 끝으로 이 글의 여러 원고는 신문과 문학잡지, 시집, 학술논문집 등 여러 매체를 통해 기왕에 발표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새로이 첨가하고 더러는 삭제했지만 그 주된 흐름이 바뀐 경우는 거의 없었음을 밝힌다. 아울러 도서출판 푸른고래 오창헌 대표와 교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신 편집장 정연순 작가에게 고맙고 기꺼운 마음을 전한다. 이천이십 년 만추 소설 무렵 달천철장 서재에서 -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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