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삶을 부각시키고 삶은 죽음을 부각시킨다. 나는 지금도 이런 것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일부러 냉혹한 할머니가 될 작정을 한 나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공포를 애정으로 짠 천으로 싸서 무거운 짐처럼 짊어진다. 그리고 공포를 조금씩 꺼내 보이며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눈으로 본 사람만이 갖고 싶어하는 소중한, 아주 소중한 보물을.
...나의 마음은 어느 순간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 그때처럼 자신의 변변치 않음을 혐오하거나 무작정 감동하는 것이다. 그럴 때 아무런 진보도 없는 자신에 놀라고 동시에 인간에게는 결코 진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새삼 느낀다. 그래서 이 글은 결코 진보하지 않고, 진보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영역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된다는 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시키지 않아도 될 영역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풍부한 풍미를 가진 것이 무척 맣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사람이 자아내는 풍미다. 몸의 모든 기관을 동원해 기관과의 접촉을 통해 맛을 보려 할 때, 나는 내면으로부터 작가 특유의 욕망이 샘솟는 걸 느낀다. 식욕과도, 성욕과도, 그리고 지식욕과도 다른 것으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묘사욕(描寫慾이라고 하고 싶은 그런 불가사의한 욕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