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말하는 광인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초월의 가능성을 통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기투한 존재다. 광인은, 온갖 물질적 조건과 제약을 지닌 주어진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거기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는 대신,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초월’의 잠재성을 한껏 발휘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새롭게 기투한 존재다. 광인은 그 세계 속에서, 그러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세계를 감지하고, 사유하고, 너무나도 일관되게 행동한다. 우리의 삶이 결여한 이 일관성이야말로 우리에게 결핍된,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광인을 낯설게 만드는 진귀한 미덕일 것이다. 내가 이러한 광인의 세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광인이 만들어낸 세계야말로, 우리가 경험했으나 포기해버린, 우리가 사유했으나 행위하지 못한 것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광인은 우리가 여러 이유로 더 발휘하지 못했던 ‘초월’의 잠재성을, 소위 정상성의 세계에서 일관적이지 못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단념하고, 그에 따라 살기를 접어야 했던 사유와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머리말’에서
좋은 번역이라면 모름지기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함께 옮겨야 한다면, 영어 번역자들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어 번역에도 해당된다. 이 번역은 타협의 산물이다. 슈레버의 증상적 문장을 되도록 그대로 전하려던 처음의 시도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국어 문장의 끔찍한 비가독성 앞에서 좌절했다. 오랜 고심 끝에 번역문의 가독성을 위해 언어적 징후들을 치유하는 길을 택했다. 긴 문장은 짧게 나누고, 어색한 수동문은 능동으로 바꾸었다. 옮긴이 주석을 통해 독일어 원문에 있는 중요한 언어적 요소들의 의미를 전달하려 노력했지만 슈레버 독일어의 낯선 증상은 어쩔 수 없이 치료되어 번역되었다. 그 결과물인 이 번역에서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고 낯선 언어들을 만날 것이다. 그것은 슈레버의 언어적 증상의 흔적일 수도, 번역자의 부족한 능력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한국의 독자들도 드디어 슈레버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 모든 부끄러움을 감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