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어릴 적에는 빨간 머리 앤(이하 ‘앤’)이 1권만 있는 줄 알았다. 1권만 읽었으니 나의 감상은 그저 명랑한 고아 소녀의 좌충우돌 ‘성공기’에 머물러 있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고 완역본과 원서를 탐독하면서 만난 앤 이야기의 감동은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주인공인 앤과 길버트의 삶 외에도 수많은 조연들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앤을 정독하고 완독하면서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명확해졌다. 1800년대 후반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섬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 이들의 삶의 방식은 비단 그 나라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공간과 문화를 초월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로 오늘날에도 그 맥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성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당연하게 여겨지고 통용되던 여러 관습들이 지금은 사라졌거나 발전과 계승이라는 방향으로 선회한 면에서는 다양성을 재해석하는 힘이 생겼다. 또 수많은 등장인물 간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인간관계의 미학을 배웠다.
몽고메리 작가가 자아낸 문장에는 삶과 사랑, 우정이라는 메시지가 녹아 있다. 마음을 울린 문장에 밑줄을 긋고 메모하며 읽는 사이 여러 종류의 완역본과 원서들이 알록달록한 색깔로 뒤덮였고, 그것들은 정서적 포만감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동일시되는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나의 경험과 지인들의 삶이 떠오르면서 반성과 사과, 감사로 꿰어졌다. 마음을 꿰뚫은 통찰들을 앤의 문장을 빌려 풀어보았다. 밝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것 외에도 인간의 본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날것 그대로의 문장 또한 포함시켰다.
11살 때 초록지붕집에 온 이후 52세까지 앤의 인생 이야기는 사계절처럼 구분되고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3권 『Anne of the island』에서 앤이 제비꽃을 꽃병에 꽂으며 마릴라에게 “한 해는 마치 한 권의 책과 같다”라고 했기에 이 책의 구성을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네 개 장으로 구분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련을 겪은 후 앤과 그녀의 가족에게 다시 찾아온 봄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앤을 모르는 독자들도 문장들과 함께 따라갈 수 있도록 여덟 권의 내용을 짧게 요약해서 실었으며, 등장인물 소개도 곁들였다.
나아가 추려 뽑은 문장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도 도전했다. 오랜 세월 몽고메리 작가와 앤 이야기에 빠져 지낸 독자로서, 프린스에드워드섬을 일곱 번이나 찾아갔던 열정을 다시 끌어내어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문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앤과 함께 프린스에드워드섬을 걷다』의 공저자인 김희준 님이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함께했다. 부족하지만 두 사람의 정성이 독자들에게 가닿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