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 세계에 천착하는 리얼리즘의 작품들 속에서 샤오홍은 자유를 갈망하고 진정한 사랑에 목말라했던 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혁명이라는 불온한 사회와 역사의 굴곡 앞에서 혁명전사가 아니면 또 어떠랴. 소박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불꽃같은 열정으로 슬픈 혁명의 시대를 살아낸 샤오홍은 고독마저 감미로운 청춘 시절에만 쓸 수 있을 법한 글들을 맘껏 써 내려갔던 그 누구보다도 멋진 청춘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어김없이 창밖 풍경에 빠져들게 되는 마법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하염없이 퍼붓는 비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비에 관한’ 나만의 특별한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언어학 이론 책을 독학하던 시기가 있었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마음으로 ‘언어’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무조건 읽고 보던 때였다. 그럼에도 그 이론공부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난해한 이론들을 따라잡기 위한 나의 무모한 도전은 결국 공부에 대한 자신감까지 잃게 만들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을 무렵, 鄧守信(떵 소우신) 교수님의 중국어 통사론에 관한 논문을 우연한 기회에 만났다.
중국어의 다양한 언어현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 그리고 그 현상들에 대한 재미난 언어학적 해석들…. 일반 언어학 이론 책으로 읽을 때는 전혀 내 것이 되지 못하고, 허공만을 부유하던 개념들이 마치 스펀지에 스며들 듯, 하나 둘씩 내 안으로 흡수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논문집을 읽으면서 내내 ‘앎의 환희’를 제대로 체험하며, 그 책과 나는 완벽하게 하나가 되고 있었다. 鄧(떵) 교수님의 글을 통해 전해오던 언어현상에 대한 명쾌한 해석들 덕분에 그전까지 어렵기만 하던 언어학 이론의 개념들이 드디어 이해가 되기 시작하던 그 순간은, 마치 들판에 서서 언어학 개념들로 내리는 비를 흠뻑 맞는 찰나와도 같았다. 그렇게 그 순간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언어학의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에 젖는다는 것…. 내게는 그랬다. 내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그 무엇인가가 완전한 내 것이 될 때 느끼는 그 환희와 동일시되는 그 무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