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저물어가는 전화의 시대에 인간의 내면, 특히 그 어두운 측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나는 이 책에서 융의 그림자 개념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사회현실, 우리의 전통사상을 비추어보고자 하였다. '그림자'의 인식은, 전체정신인 본연의 자기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다.
나는 융의 이러한 정신을 충실히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림자가 세계와 우리의 사회현실 그리고 전통문화에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제시하고 또한 그러한 사회현상의 근원이 각자 마음의 심층, 즉 무의식에 있음을 제시하려 했다. 무의식은 우리의 모든 정신현상과 문화현상에 표현되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자기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의식화해 가는 작업이다.
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융을 알아야 한다. 19세기 후반기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대에 살았고 동양과 서양사상에서 인류 보편의 원초적 심성을 발견함으로써 양대 사상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이 위대한 의학적 심리학자의 학설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그를 비판하고 성급하게 자기 학설을 내세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융의 심혼론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한다. 다만 최선의 방법으로 융의 생각을 융의 언어로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이를 한국인과 한국문화현상에 적용하면서 경험한 것 중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매우 겸허한 마음으로 말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