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시(詩)이기도 하겠지요. 닿을 수 없는, 그러니 완성될 수도 없는, 인간 영혼의 가장 먼 곳을 꿈꾸며 떠날 때 비로소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고백컨대, 저는, 그런 여행을 감행해보지 못했습니다.
시에 마음이 먼저 빼앗기고, 빼앗겼던 마음을 울력하듯 다시 북돋아, 울력한 마음에 여행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여러 해 돌아다니기는 한 것 같은데... 영혼의 가장 먼 곳까지 떠나려면, 저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 다시 여행을 간다면, 영혼의 조금 더 먼 곳을 향해 떠날 수 있을 것 같고, 그때에는 비로소 시를 쓸 수도 있을 것도 같습니다.
시 한편을 쓰면, 시인은 쌀 두 말을 살 수 있다. 국밥 한 그릇 값의 시집 한 권이 팔리면, 시인은 굵은 소금 한 됫박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시인에게는 시가 밥이다. 시인에게 시가 밥이라 함은, 시가 밥 먹여주므로(정말로?) 시가 밥이기도 하겠지만,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듯 시를 생각해야 하니 시가 밥이고, 시밖에 몰라 제일 만만한 게 시이므로 시가 밥이고, 시만 먹고는 못 살지만 또 시 없이는 못 살기 때문에 시가 밥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시는 언어로 가득 찬 밥임에 틀림없다. 그 밥은 시인의 영혼으로부터 나왔기에 시인의 것이지만 만질 수는 없는, 다른 누군가의 영혼을 든든하게 살찌우는, 말하자면 시의 밥이다.
그리하여 시를 향해
리듬은 말을 걸고, 비유들은 손가락을 걸고, 이미지는 마술을 건다.
그러니 시는 세상에 말을 걸고 그 말에 손가락을 걸고 그 손가락에 마술을 건다.
화자는 시인을 걸고, 아이러니는 딴지를 걸고, 패러디는 수작을 건다.
그러니 시는 세상에 다른 나를 걸어놓고 다른 나를 향해 딴지를 걸고 그 딴지에 수작을 건다.
이렇게 걸고 걸며,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밑그림을 그려주는 책이었으면 한다.
2021년 여름에
정끝별
무엇보다 ‘교과서에 실린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정말로 좋아할 수 있도록, 시의 맛과 시의 정신을 느끼면서 풍요롭게 ‘맘껏’ 상상하며 읽어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시 참고서들부터 덮어라. 모든 시 구절에 밑줄 긋고 달아놓은 단답형 해석부터 덮어라. 그리고 먼저 읽어라, 느껴라, 상상하라, 그리고 궁금해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시가, 여러분 앞에!
나는 이미 오늘이 아니다. 그러나 오간 데만 오간 것들과 한 것만 또 한 것들, 여기의 시간이다. 삶보다 빨리 달려가는 말(언어)들의 시간이다.
여기 너머의 사랑이다. 돈돈돈스스스돈돈돈 타전을 기다리는 중이다. 나뭇가지 끝에 걸린 미래의 별이나 이름을 빼앗긴 과거의 명왕성에게도 나의 사랑을 전해다오.
내 것이 아니었던 내 것들과 결코 내 것이 아닐 내 것들을 향해 다시 꿈꿀 것이다. 한 글자의 이름을 가진 막막한 사물들에게도 안부 전해다오.
여기에서 모든 여기 너머로 다리를 놓는다. 허밍의 너일까. 너를 따라 이 삶을 통과하고 있다. 나는 너를 그렇게 시라고 부른다.
시는 번역되지 않는 ‘그 여백’에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는 번역되고 남는 ‘그 의미’에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모국어로서의 제 언어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 의미의 영역이 있다는 걸 믿게 해 준 시편들이다. 그 의미는 지금의 우리 시와 다르기에 새로웠으며 또 같기에 웅숭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되지 않는 아니 결코 번역될 수 없는 그 여백이 있음을 믿고 또 믿는다. 그 여백을 채워 읽는 건 오롯이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듯 모든 언어에도 저마다의 향기와 무늬가 있다는 것은 나의 오랜 믿음이다. 때문에 나의 비평적 화두는 늘 어떠한 독법이 그 시인의 언어를 가장 잘 드러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꼼꼼하고 다양한 시읽기였다. 시 자체가 <천 개의 혀>를 가진 무한한 언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시읽기의 방식 또한 그에 걸맞는 <천 개 이상의 혀>를 가진 언어여야 한다는 보다 열린 비평적 태도로 이어진 것이리라.
오래 연모해 오던 이로부터 눈맞춤 한 번 받은 마음이 이러하겠지요. 용맹정진이란 마음 깊은 곳에 잊지 않고 늘 지니면서 놓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은 시는 제 깊은 안으로부터, 그러나 제 밖 아주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제 시의 품이 좁고 울퉁불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 오래 깊게품겠습니다. 그리고 시詩 가 상賞이라고 일러 주셨던 큰 말씀, 마음에서 놓치지 않겠습니다.
우리 삶의 둘레나 넓이나 깊이를 가늠하기 위해 필요한 삶의 좌표 혹은 기준, 그 상수가 바로 π다. 우리 삶에 3.14배를 더해주는 그 무엇! 사랑일까, 이념일까, 돈일까? 희생일까, 의지일까, 투쟁일까?
우리 삶에서 시가 차지하는 역할이 딱 π만큼을 곱해주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시가 늘 우리 삶을 3.14배 더 길고 더 넓고 더 깊게 해주었으면 좋겠고, 시학이든 시론이든 시비평이든 그것들이 우리 시를 3.14배 더 길고 더 넓고 더 깊게 해주었으면 더 좋겠다. 시의 위의(威儀)가 날로 추락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 시인의 아마추어리즘과 시의 골동품화가 피부로 지각될 때가 많은 지금-여기에서 나의 바람은 철 지난 낭만주의자의 아니면 고립을 즐기는 몽상주의자의 망상적 꿈일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우리의 삶을, 시학(시비평)은 우리의 시를, 위풍당당하고 기운생동하게 하는 그 본래적 위의와 책무를 지니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π라는 상수처럼! 이 평론집의 제목이 ‘파이의 시학’인 이유다.
아무리 달리 생각해본들, 여전히 시를 쓴다는 것, 여전히 시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일이고 살아가는 일이다.
삶에 파이를 곱하는 시, 시에 파이를 곱하는 시비평을 꿈꾸며!
'흰 책' 이 제목은 그 동안 내가 붙들고 있었던 기존의 언어 혹은 기존의 시에 대한 도전이랄까 부정이랄까 하는 의미도 담고 있을 겁니다. 동시에 소멸, 부정, 거부, 도전의 맥락과 생성, 순수, 출발의 맥락을 함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제가 가까스로 매달려 있던 기존의 시에 대한 거부이자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