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서명응과 서유구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할 때였다. 필자는 1995년에 마무리한 학위 논문에서 정조 시대의 규장각을 배경으로 활동한 성해응, 홍석주, 정약용의 경학사 상과 경세론을 정리하였고, 서명응과 서유구도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서명응은 세손 시절 정조의 스승이고 정조가 규장각을 건립할 때 핵심 실무자로 활동하였으며, 서유구는 정약용과 비슷한 시기에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정조의 교육정책에 의해 길러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6년에 이지형 선생님의 정년기념논총에 수록할 논문을 작성하면서 서명응의 기자 인식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서명응에 관한 기초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논문을 바로 작성하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당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서명응의 문집으로 알려진 『보만재집』 이외에도 필사본 『보만재총서』와 『보만재잉간』이 소장되어 있었고, 두 책에 수록된 수많은 저술과 함께 이와 별도로 편찬된 서명응의 저술을 많이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논문 주제를 바꾸어 서명응 저술의 전모를 밝히는 글을 작성하여 학계에 소개하였다. 그 다음에 필자는 서명응의 기자 인식을 다루는 논문을 작성하였고, 이 글은 조동걸 선생님의 정년기념논총에 수록하였다. 그로부터 시간은 30년 가까이 흘렀고, 논문을 올렸던 두 분 선생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서유구에 관한 연구는 2009년 진단학회에서 개최한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에 참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고, 필자는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편찬한 배경으로 그의 가학과 규장각 활동, 관리 생활을 다루었다. 다음 해에는 정조가 내린 십삼경(十三經) 책문에 대해 정약용과 서유구가 작성한 답변을 비교하는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이는 수년 전에 출판한 『정약용의 경학과 경세학』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필자가 서명응과 서유구의 학문 활동을 다룬 논문을 모은 것이다. 기왕에 발표한 논문들을 단행본으로 묶으면서 서론과 결론은 새로 작성하였다. 서론에서는 서명응과 서유구가 활동했던 조선 후기 중앙학계의 학풍을 개괄적으로 소개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선 후기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조선중화주의’와 고증학 및 서학의 도입, 수도권의 도시화와 이에 대응하여 나타난 경세학을 다루었다. 이는 두 사람이 활동한 시대적 배경에 해당한다.
제1부는 ‘서명응의 학문 활동’으로, 그의 생애와 교유 인물, 규장각 활동, 저술의 종류와 특징, 기자 인식, 세계지리 인식을 다루었다. 서명응은 정조 초년에 규장각 기구를 정비하고, 국가적 편찬 사업에서 핵심 실무자로 활동하여 그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과 서명응이 남긴 27종의 저술을 개략적으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기자 인식에서는 『기자외기』와 『주사』, 세계지리 인식에서는 『위사』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서명응의 학문이 가진 특징을 정리하였다.
제2부는 ‘서유구의 학문 활동’으로, 그의 규장각 활동과 관리 생활, 지역 인식, 수원 유수 활동을 다루었다. 서유구는 정조 시대에 규장각이 주관한 많은 출판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19세기에는 지방관으로서 주목되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지역 인식에서는 「의상경계책」, 수원 유수 활동에서는 『화영일록』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서유구가 농정을 개혁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강조하였다.
결론에서는 서명응과 서유구의 학문에 나타나는 특징을 정리하였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로 가학적 전통을 계승한 측면이 있고, 정조가 건립한 규장각을 중요한 활동 무대로 삼았기에 많은 공통점이 나타난다. 그러나 두 사람이 활동한 시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고, 학문적 관심에도 다른 점이 있어 각자의 개성이 나타난다. 필자는 이러한 두 사람의 학문이 당대의 조선학계를 주도했던 지식인의 학문적 정보와 경세적 관심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서명응과 서유구의 학문 활동을 단행본으로 묶으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 정조가 건립한 규장각에서 이들과 함께 활동한 서호수, 서형수, 서유본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고, 서명응이 남겨 놓은 많은 저술과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더 적극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관련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 책은 역사문화연구소가 주관하는 ‘역사문화총서’ 시리즈로 간행하게 되었다. 역사문화연구소의 유봉학 소장님은 학계의 선배이자 서유구 연구의 선배신데, 이 책의 간행으로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숙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유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김명호 선생님은 필자의 서명응 연구가 계속되지 않자 더 많은 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하셨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본서의 편집을 맡아주신 신구문화사 최승복 편집부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 머리말
오래 전에 효명 세자의 '왕세자입학도첩'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조선 시대의 궁중 화가가 최고의 솜씨로 그려 낸 여섯 폭의 그림이었지요. 그림을 보다가 왕세자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귀하디귀한 왕세자가 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공부를 했을까요? 성균관에 가서 입학식을 치르는 왕세자에게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게 한 것은 그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선생님에게 깍듯이 예절을 갖추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지식보다 마음의 수양을 중시하고, 직접 몸으로 실천해 보이는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던 200년 전 조선의 왕세자 교육. 그 내용을 오롯이 담은 이 책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울림은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