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연치가 쌓여 감에 따라 모름지기 시정신이 맑고 시세계가 깊어져 그 경지가 원숙하고 고매해져야 하거늘, 나는 오히려 퇴영하여 치졸해지니 부끄럽다. 솔직히 화까지 난다. 특히 암 투병 중이었던 근 몇 년 동안은, 왜 더 좋은 시를 쓰지 못했던가 깊은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시작(詩作)을 삼가고 작고 시인들의 명시를 곰곰이 되읽으며 위안을 얻었다. 예전에는 좋은 시란 곧 새로운 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입에 붙고 가슴에 남아서 두고두고 곱씹게 해야 진정 좋은 시가 아닌가 한다. 찬찬히 읽고 그리면서 핏줄처럼 끌리는 명시들을 다시 만난 것은 큰 행복이었다. 시정(詩情)에 붓을 다시 든 것도 병상에서였다.
이번 시집의 발간은 두 번째 시집 <내 마음의 솔밭>에 뒤이은 세 번째이다. 시업 50년을 감안하면 너무 적은 수량의 작업이다. 워낙 과작하는 성향이라 생긴 결과라면, 그건 자위의 변이 될 터이고, 냉정히 말해서 작시에 태만했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시집 <흰 저고리 검정 치마>는, 계산해 보니 8년 만에의 소출인즉, 비교적 적정한 간격을 두었다고 할까. 문제는 내가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작시에 임했는가 하는 점이고, 시쓰기에 공부를 넓게 하고 생각을 깊게 했는가 하는 점인데, 결과물로 보아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