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얼마 전 폭발적인 인기 속에서 막을 내린 드라마 '허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드라마의 후반부에 잠시 광해군이 등장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서 묘사된 광해군은-허준의 입장에서 볼 때- 온화하고 총명한 왕세자이자 국왕이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온 이후 10여년 동안 광해군 관계 자료를 뒤적였던 저의 뇌리에 각인된 광해군 역시 '허준'에서 묘사된 모습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는 '허준'에서 묘사된 그의 모습에 소심하면서도 우유부단한 측면을 추가하면 '광해군'이라는 인간의 본 모습을 비교적 근사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아무리 총명하고 인간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1623년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를 만나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인조와 서인들은 그를 쫓아내면서 "어머니를 유폐하고 동생을 죽인것",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를 배반한 것"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럼에도 '패배자'였던 광해군은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고 조선후기 내내 '폭군', 혹은 '패륜아'라는 악명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형제를 몰살하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태종)이나 멀쩡한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보다 포학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는 1592년 왕세자가 된 이후 1608년 왕이 될 때까지 물경 17년 동안 왕세자 수업을 받았던 '준비된 국왕'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피부로 체험했던 그는 명청교체기로 불리는 동아시아의 대격변기를 슬기롭게 넘겼습니다. 버겁기 짝이 없는 명과 청 두 강대국 사이에서 한편으로는 명을 주무르고, 한편으로는 청을 다독이면서 양자 사이의 대결 속으로 말려드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국왕 가운데 주변 열강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치밀한 '정보 마인드'를 지녔던 그는 주변 열강에 관련된 정보를 끊임없이 축적했고, 그것은 그대로 유연하고도 냉철한 외교정책을 펼치는데 기본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광해군 시대의 한반도나 오늘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전히 주변 열강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지난 6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기적처럼 실현된 남북정상회담은 우리민족에게는 절체절명의 역사적 기회입니다. 19세기 후반 이래 한반도를 주물러왔던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영향력을 넘어서 통일문제를 포함한 한반도의 장래를 우리 손으로 결정할 수 있는 단초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변 열강들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더 바빠졌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지나 않을까 초조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변 4강에게 사지를 하나씩 붙잡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과연 이들 열강의 입김을 넘어서서 민족의 통일을 이뤄낼 수 있을까요? 그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외교 전문가' 광해군의 삶과 그의 시대는 분명 소중한 거울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2000년 8월 4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코멘트)
17세기 이후 명이 망할 때까지 한중관계의 분수령이 된 것은 임진왜란과 그 전쟁에 명이 참전했던 사실이었다. 명은, 명군의 참전과 장기 주둔을 통해 조선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거니와 이후 조선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결정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에서 미국과 주한미군이 차지하는 영향력을 연상시킬 만큼 큰 것이었다. 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참전하여 원조한 것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再造之恩)'로 여겨 숭앙해왔거니와 당시 한반도에서 명군의 활동이 과연 '재조지은'이라 부를 만한 것인지를 살폈다. 명군 참전이 조선에 남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영향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