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엔 꽃,
남아 있는 한 손엔 보석을 쥐고 있는 당신에게
버리라고 말한다면
무엇을 버리겠는가?
당신은 물론 꽃을 먼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버리라고 말한다면
어리둥절하지만 당신은
나머지 것마저 버릴 수밖에 없다.
왜냐면 당신이 쥐고 있던 그것들은
버리라고 명하는 그 사람을 위해 가지고 온 것이니까.
그러나
꽃도 보석도 내려놓은 당신을 향해 그 사람은 여전히
버리라고 말한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당신은?
당신과 내가 참으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 말 알아들었으면 눈 깜박거려보세요.” 벽만 바라보며 누워 계신 노모에게 말한다. 뜨고 있지만 눈동자가 고정된 채 노모는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하기조차 어렵다. “이제 곧 다른 별로 가실 거예요. 두려워하실 것도 없고, 미련 가질 것도 없어요. 슬프지만 우리 헤어질 때 안녕, 하고 웃으며 헤어져요. 알아듣겠으면 눈 깜박 해보세요.” 벽만 보던 노모의 눈이 거짓말처럼 한 번, 깜빡거리고선 감긴다.
이제 어머니는 이 별을 떠나 다른 별로 가셨다. 시작했던 소설은 만 오 년 동안 중단되었고, 노모가 돌아가시자 이번엔 내게 병이 왔다. 극심한 어지러움증이 찾아왔고, 결국 한쪽 청력을 상실했다. 이 책은 삶의 그런 파란 속에 집필되었다. 끝내지 못할 것 같은 좌절감에 컴퓨터의 전원을 몇 번이나 껐지만, 어지러움이 줄어들자 불현듯 일어나 끝을 봤다. 삶의 여기저기를 밝혀주던 진리의 스승들, 그리고 책이 출간되기까지 작고 큰 도움 아끼지 않은 분들께 고마운 마음 표한다.
흐르는 물처럼 세월은 많은 걸 씻어가지만 그러나 그런 흐름 속에서도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인생에는 있다. 그를 보낸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한 달이란 짧은 시간 동안 토해내듯 시를 쓴 것도 아마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여, 이 시집은 비록 그가 직접 쓴 시들은 아닐지언정 시인이 독자보다 많은 이 시대에 시인이 뭐 대단한 우상이라도 되는 양 흠모하던 불운의 독신자 故 이창훈과의 우정이 남긴 유작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오랜 옛날, 군복에 작대기 하나를 달고 있던 시절, 마치 윤무라도 추듯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돌아가며 죽을 만큼 정신없이 맞던 때가 있었다. …(중략)…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는 내 몸뚱이를 아득한 공간에서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마치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듯, 구타당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던 내 안의 또 다른 나…. 내 안에 있던 나의 우주가 몸 바깥으로 빠져나와 당하고 있던 제 몸뚱이를 지켜보고 있었다고나 해야 할까?
시를 쓰고 그 시를 버리고, 직장을 갖고 그 직장 또한 버리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커다란 나무 한 그루로 자라는 동안, 줄곧 내 머릿속에 있던 의문은 ‘나를 지켜보던 그 존재가 무엇인지?’였다. 그때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책은 그런 의문에 대한 오랜 탐구이다. 그동안 내게로 왔던 수많은 책과 글, 나를 매료시켰던 영적 스승들의 말씀에 기대어 해묵은 의문에 대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 흔적 중 하나이다.
정신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그림을 보며 재밌다, 재밌어, 라고 말했다. 넘어져 뇌가 손상된 건지 알아듣기 힘든 어눌한 발음으로 재밌다고 말하는 어머니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치매에다 파킨슨병으로 근육이 굳어가는 노모의 표정은 웃고 있어도 언제나 찡그린 듯 보인다. 몇 번씩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이제 임종의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말년의 병상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늙어가는 아들이 그린 그림을 보며 찌푸린 미소를 보내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문득 벽 위에 입을 하나 그려 달라 하셨다.
입….
말하는 입, 웃는 입, 노래하는 입, 먹는 입, 재잘거리는 입….
누구 하나 찾지 않는 병상에서 노모는 아마 고독할 대로 고독하셨던 모양이다. 외로워서 죽겠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그때의 외로움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의 진한 고독을 절감하게 하는 어머니의 그 ‘입’을 생각하면 가슴 전체가 허물어지는 것 같다.
어떤 우연이 우리를 인연되게 했을까? 어떤 인연이 만남이라는 인연 속으로 우리를 끌어왔고, 이렇게 안타까운 이별의 시간으로 이어지게 했을까? 어머니에게 그림을 보여드릴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우연히 만났고, 필연적으로 이별하며 우리는 그렇게 한생을 살아가고 마친다. ‘우연이 끌어당긴 만남이 또 하나의 이별을 만들어내며 눈물 뿌릴 때.’ 미친 듯 그렸던 그림을 폰으로 찍어 어머니께로 가며 나는 내가 썼던 시를 입 속으로 음미한다. 모든 입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모든 입들은 눈물을 지우고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입들은 따뜻하게 말하고 사랑스럽게 미소 지어야 한다. 모든 입들은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