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에 죽은 시집
푸르른 소멸을 부끄럽지만 되살린다.
오답으로 얼룩진 삶이라 해도
원망할 것 없다
죽음이라는 정답을
곧 손에 쥘 테다
삶은 지리멸렬했으나
죽음은 저리 단호한 법
우연히 왔다
반드시 간다
일생이 불평부당한 야바위 노름판이라 해도
곧 확실한 패를 손에 쥘 테다
어떤 타짜도 죽음이라는 패를
밑장빼기할 수 없으니
사기칠 수 없는
죽음이야말로 얼마나 공정한가.
2024년 시월에
비굴[卑屈]
자기 검열의 벽에 막혀서,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하고 있는, 어떤 치열한 시인을 생각하면서, 가까스로 비굴을 견디는 중이다.
비참[悲慘]
천 길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막다른 철벽을 맨몸으로 부수고 있는, 어떤 처연한 삶을 생각하면서, 가까스로 비참을 견디는 중이다.
사기[詐欺]
마침내 붕괴될 집을 또 한 채 지어놓고, 튼튼하다며 세상에 없던 집이라며 당신에게 교묘한 분양 선전 찌라시를 보내는 중이다.
2021년 9월
박제영
“청춘이라는 간이역을 찾아가는 추억 여행”
의미 없는 하루 또 하루, 산다는 것이 비루해질 때 다시 불러보는 그 시절이 있습니다.
빈 노트에 별과 달과 구름의 푸른 문장들로 가득 채웠던 시절이고, 낡은 기타 하나로 지상의 모든 음악을 불러내었던 시절이지요.
사랑이라는 그 말, 사랑인 줄 모르고 사랑에 젖었던 시절이고, 이별이라는 그 말, 이별인 줄 모르고 이별에 젖었던 시절이지요.
어린 왕자가 너무 슬펐고, 너무 슬퍼서 아름다웠던 그 시절,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이라는 간이역이 어느 날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의미 없는 하루 또 하루, 산다는 것이 공허해질 때 문득 어린 왕자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청춘이라는 간이역을 찾아가는 추억 여행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어린 왕자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추신 하나. 이 책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지 않습니다. 원문과 많은 부분 다릅니다. 불필요하다 싶은 문장은 빼기도 했고, 필요하다 싶으면 없는 문장을 넣기도 했습니다. 어떤 문장은 대화체로 바꾸기도 했고 또 어떤 문장과 문장은 서로 순서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각 장의 제목도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제가 어린 왕자를 만나는 방식대로 번역하고 각색하고 편집한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추신 둘. 편집과 디자인을 총괄한 디자인패러다임의 전병무 이사님, 새로운 캐릭터로 삽화를 만들어낸 김선라 작가님, 이태주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책의 상당 부분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신 달아실출판사 윤미소 대표님과 발문을 써주신 월간 『태백』 김현식 대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2017년 가을
약이 되거나 독이 되거나
이것은 여시아문(如是我聞)입니다. 그러니까 제 이야기가 아니라 촌철살인하면 둘째간다 해도 서러울 우리 동네 현식이 형의 이야기입니다. 형에게 들은 것을 다만 글로 옮겼을 뿐입니다.
이것은 험한 세상 그 망망대해의 고독과 거친 풍랑을 헤치며 건너온 한 사내의 파란만장을 기록한 것입니다. 물론 아주 일부일 뿐입니다. 모쪼록 행간을 통해 전체를 읽어낸다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시적인 형식을 조금 빌렸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시다 아니다 시비를 걸지는 말아주시길. 詩非, 시든 아니든 무에 상관이겠습니까. 어쨌든 이 글은 당신에게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되는지는 오롯이 독자인 당신에게 달린 것이지요. 물론 저로서는 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 동안 살펴본 우리 동네 현식이 형은 세상을 바라보는 참 독특한 시선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참 독특한 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을 한 번 바라보면 어떨까. 그런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면 어떨까. 그 동안의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을 간접 경험해본다면 어쩌면 그만큼 세상이 조금은 넓어지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아우의 무례를 너그러이 받아주신, 김현식 형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삽화를 멋지게 그려준 김준철 화가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시인 전윤호 형이 있다는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이태 전 어느 날 현식이 형, 윤호 형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이 술을 마실 때, 윤호 형이 그러는 겁니다. 현식이 형의 말에는 반전의 묘미가 있다고, 그 말들을 정리해서 “우리 동네 현식이 형”이란 책을 내면 좋겠다고. 애초에는 집필까지 윤호 형이 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글은 제가 옮기는 것으로 얘기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전윤호 형의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이 책이 나올 수는 없었을 겁니다. 윤호 형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까닭입니다.
2021년
박제영 두손
디지털 세상, 0과 1로 구성된 비트의 세상. 자본과 결합된 디지털이 무섭게 질주합니다. 그 어느 역사의 지층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무서운 속도, '빠름'과 '경쟁'이 삶의 미학이 됩니다. 0과 1사이의 무한대로 이어진 숲을 천천히 걷는 일, 아나로그적 산책, 느림의 미학은 어느새 불순하고 불온한 것이 됩니다.
오래된 것, 과거의 지식은 없고 오직 현재의 정보만이 네트웍을 통해 자기증식하는 세상에서 소멸되어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아픔...
제 책 '푸르른 소멸'은 일상의 기록입니다. 아나로그에 대한 희망을 품은 자기 기록입니다. 독자들에게 단 하나의 공감이라도 줄 수 있길 기대하면서....(2000년 6월 14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