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전윈의 장편소설 <객소리 가득 찬 가슴(一腔廢話)>은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유토피아(Utopia)가 아닌 디스토피아(Distopia)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다. 매스 미디어가 인간을 지배하는 오늘날, 인류가 유토피아를 추구하기 위해 인류의 머리와 손으로 개발해낸 영상물이 이젠 그 자체로서의 모순과 한계를 지닌 채 인간을 한꺼번에 정신 나가고 멍청해져버린 집단으로 가지런히 노예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작가는 중국 고전 문학 작품을 넘나들면서 오십 번지 서쪽이라는 특정 공간을 설정해 오늘날 전 지구촌이 한통속으로 광분하고 있는 모습을 아주 코믹하게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소설 형식으로, 때로는 오십 번지 서쪽에서 벌어지는 한바탕의 마당극으로, 때로는 참이 곧 거짓이요 거짓이 곧 참일 수도 있다는 비논리적인 논리의 칼을 불쑥 들이미는 작가의 주제의식으로, 때로는 독자들까지 끌어들여 다 같이 정신 나가고 멍청해져서 영양가 없고 소금기 없고 영혼마저도 사라진 우리들의 초상을 되돌아보게끔 한다. 이 소설은 우리 스스로 스위치를 꾹 눌러 컨트롤하는 영상물로 인해 우리 스스로 조정당해 이미 정신 나가고 멍청해진 단계에서 귀 멀고 벙어리가 되더니, 귀 멀고 벙어리가 된 단계에서 의리 없고 인정도 없는 존재가 되더니, 의리도 인정도 없는 존재가 목재가 되고, 목재는 너덜너덜 썩어 문드러진 목재가 되더니, 썩어 문드러진 목재는 폐품과 쓰레기가 되어서 넝마가 되고, 폐품과 쓰레기에서 멍청한 원숭이가 되고, 멍청한 원숭이는 멍청한 닭이 되더니, 연달아 또 멍청한 닭에서 파리가 되고 결국 숯검정이 되어버린 우리의 초상을 향해, 우리들 스스로 우리를 각성시키는 자객이 된다. 때문에 이 작품은 글이 아니라 칼이며, 칼이 아니라 불이며, 불이 아니라 어쩌면 사막화된 우리가 비로소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유토피아를 찾아나서는, 인간의 집요한 탐색 과정을 단체사진을 통해 처절하게 보여주는 몸부림일 수 있다.
[……]
작가 류전윈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이분법적인 잣대로 구분하기 어렵다. 또한 진지함과 가벼움 역시 그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객소리 가득 찬 가슴>을 그야말로 취경(取經)하듯 깊숙이 탐색하지 않고 작가의 황당한 ‘객소리’에 귀와 눈이 현혹되고 만다면 아마 ‘한바탕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구나’ 여겨질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소설은 대단히 코믹하면서도 유희적이고 악동 같은 장난기로 전개된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소설적 기법이며, 작가가 독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고도의 작전에 불과하다. 장편소설 <객소리 가득 찬 가슴>의 전개 방식은 시종일관 일상의 진지함을 뒤집는 유희와 느린 농담 그리고 블랙 유머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런 가벼운 어원이나 소재란 어디까지나 너무도 진지한 우리 시대의 초상을 그려 나가기 위한 작가의 올가미이며, 그런 올가미 뒤에 숨겨진 함정이야 말로 이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인 셈이다. (‘옮긴이 해설’에서)
펄벅의 <대지>를 뛰어넘는 치열한 격동과 눈물
‘골드마운틴’의 꿈을 쫒아 로키산맥에 도달한 그들은 얼마나 야만적이고 미개한 환경에 맞닥뜨려야 했던가? 그들은 얼마나 멸시받고 조롱당해야 했던가? 그런 속에서도 그들은 또 얼마나 지독한 인내와 도전으로 고국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누각주택을 짓고, 애국단체에 돈을 보내고, 군자금을 헌납했던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낯선 이국땅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쿨리(coolie)들, 민족적 신분 때문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야 했던 상처 입은 영혼들의 이야기는 중국인의 비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류사에서 국경과 민족과 국제화 사회에 던지는 파문이 지대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비슷한 전철의 이민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열여섯 살에 캐나다로 건너가서 서른한 살에 고향집에 돌아와 결혼했으나 여든 살이 넘어 죽기까지 세 번밖에 만나지 못한 부부의 고독한 결혼생활과 뿔뿔이 흩어져 살아간 세 자녀의 애절한 운명은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골드마운틴》은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초창기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들이 어떤 비애와 학대를 겪으면서 살아남았는가를 소상하게 밝혀내 오늘날 경제 부흥을 이룩한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매우 큰 성원을 받고 있다.
장링은 도서관에서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고 오랜 여행을 통해서 폭 넓은 사실을 밝혀내므로 그만큼 작품세계가 풍부하고 객관적이며 자유롭다. 장링의 《골드마운틴》은 독자를 흡입하는 힘이 대단하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대단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펄벅의 <대지>를 뛰어넘는 치열한 격동과 눈물
‘골드마운틴’의 꿈을 쫒아 로키산맥에 도달한 그들은 얼마나 야만적이고 미개한 환경에 맞닥뜨려야 했던가? 그들은 얼마나 멸시받고 조롱당해야 했던가? 그런 속에서도 그들은 또 얼마나 지독한 인내와 도전으로 고국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누각주택을 짓고, 애국단체에 돈을 보내고, 군자금을 헌납했던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낯선 이국땅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쿨리(coolie)들, 민족적 신분 때문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야 했던 상처 입은 영혼들의 이야기는 중국인의 비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류사에서 국경과 민족과 국제화 사회에 던지는 파문이 지대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비슷한 전철의 이민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열여섯 살에 캐나다로 건너가서 서른한 살에 고향집에 돌아와 결혼했으나 여든 살이 넘어 죽기까지 세 번밖에 만나지 못한 부부의 고독한 결혼생활과 뿔뿔이 흩어져 살아간 세 자녀의 애절한 운명은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골드마운틴》은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초창기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들이 어떤 비애와 학대를 겪으면서 살아남았는가를 소상하게 밝혀내 오늘날 경제 부흥을 이룩한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매우 큰 성원을 받고 있다.
장링은 도서관에서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고 오랜 여행을 통해서 폭 넓은 사실을 밝혀내므로 그만큼 작품세계가 풍부하고 객관적이며 자유롭다. 장링의 《골드마운틴》은 독자를 흡입하는 힘이 대단하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대단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어딘가에 이런 대목이 실려 있을 것입니다. 이런 대목을 써내려가는 담담한 기분 그대로 중국 차를 소개합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누런 색의 모래가 흩날리는 황토고원 언덕에서 백색으로 피어난 메밀꽃을 목격하고 있노라니, 새로운 색상을 발견했다는 반가움을 앞질러, 이 땅의 지형지세에 어울리지 않는 처량한 사물을 발견한 듯 안쓰럽다는 느낌이 든다.
고원지대의 햇살은 한낮이면, 길을 지나가는 차량을 삶아버릴 듯 뜨거운데, 온통 누런 색깔로 점철된 황토고원의 색상과는 동떨어지게 철없이 피어,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서럽게 만드는 저 백색의 꽃이 필경 메밀이 맞는 것일까.
덜커덩대는 버스에 앉아 그 백색의 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의 조국으로부터 멀리,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나 여행을 하고 있건만, 나의 조국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멀어지지 못한 슬픈 나를 목격한다. 나의 시선은 하얀 그 메밀꽃밭에 있고, 내 육신을 태운 시골완행버스는 위수를 향해 달려간다.
이 고장으로 오니까 모든 것이 낡아 보인다. 덜커덩대며 달려가는 완행버스뿐만 아니라 버스에 탄 고객들까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현실로부터 멀어져 과거를 향해 달려 가 버린, 과거의 포로들 같다. 문득 환영처럼 백거이의 시가 떠오른 것은 어찌된 일일까.
村夜
霜草蒼蒼 切切 벌레소리 애절하고 서리 앉은 풀이 퍼렇구나
村南村北行人絶 행인들의 인적은 마을 남쪽 북쪽 어디에도 없구나
獨出門前望野田 홀로 문밖으로 나와 들판을 망연히 바라보니
月明蕎麥花如雪 달빛을 받은 메밀꽃이 흰 눈을 이고 있구나
우리 일행은 지금 티엔쉐이(天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갈수록 누런 모래벌판이 전개될 뿐인데, 누런 모래벌판에 어둠이 내리면 천수로 바뀔 것인가. 허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메밀밭 위로 검은 어둠이 내려앉는 길, 이 지천으로 엎드린 메밀꽃에도 밤이 찾아오고 있다.
이 황량한 땅을 일궈서 메밀 씨를 뿌렸던 인간은 가을의 풍요를 생각해 모질게 더운 날들을 견디는 것일까. 사막의 모진 여행이 끝나면 비루춘이 생산된다는 거대한 호수를 향해 나아갈 것을 다짐하며 티엔쉐이의 작은 숙소를 향해 달려간다."
감사합니다.
(2002년 1월 4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