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짧아도 뜻은 의미심장한 한시는 분명히 우리 조상의 숭고한 얼이 담긴 훌륭한 선비 문화의 유산이다. 다만, 입맛 까탈스러운 시어머니 식성처럼 무척이나 까다롭고 복잡한 시규(詩規) 때문에, 한학자라고 해서 섣불리 덤벼들 장르가 아니다. 아무리 한문에 박식하더라도 한시 작법은 별도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학에 조예가 깊으면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이겠으나, 한글을 터득했다고 해서 누구나 문장가가 되거나 아무나 명시를 쓸 수 있는 게 아니듯이, 한시 역시 한자 문장 구성 능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에 따른 시적 감각까지 뒷받침이 되지 않고선, 품격 있고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없다는 얘기다. 필자는 선친께서 한학자이셨기에 다행히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한자를 많이 접하게 되어,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한문 실력으로 중학교 때 이미 상갓집 조객록과 부의록 등을 감당하고, 김삿갓 시를 흥얼거리며 제법 자작 한시 ―비록 요체이긴 했으나―를 끄적거릴 수 있었던 것도 내겐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그 동안 틈틈이 갈무리해 온 자작 한시 100편을 엄선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었으나,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유머는 외국어로 옮겨지면 망하는 재능 중에 으뜸가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한시 역시 각 글자의 심오한 뜻을 모르고선 그 진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일단 번역을 하면 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여담이 되겠으나, 한시 풀이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한나라 원제때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落雁)은, 양귀비ㆍ서시ㆍ초선과 함께 중국 4대 미녀 중의 한 사람으로, 전쟁을 막기 위한 화친 정책의 일환으로 흉노의 선우호한사에게 바쳐져, 일생을 오랑캐 땅에서 희생하게 된 그녀의 비통한 심정을, 훗날 중국의 어느 옛 시인이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하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이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기게 되었다.
훗날 조선조 때 어느 시골 원님이 ‘胡地無花草’라는 과제(科題)를 내걸고 향시를 보게 되었는데, 이 과시(科試)에 응시한 어느 서생이 오언절구의 기ㆍ승ㆍ전ㆍ결구를 모두 “胡地無花草 / 胡地無花草 / 胡地無花草 / 胡地無花草”라고 해서 장원급제에 등과되었다고 한다. 풀이한 내용인즉슨,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다 하나 / 오랑캐 땅이라고 해서 화초가 없으랴 /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만 /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다 하네”였다고 한다. 이렇듯 한시는 직역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의역으로 풀이하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해석될 수가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여기선 한자에 익숙지 못한 한글세대를 위하여 주로 의역으로 적당히 풀어 써 놓았음을 너그러이 양지해 주시기 바랄 뿐이다.
아무튼, 본 <한시 백선>의 품격은 독자 제현들께서 판단할 몫이겠으나, 앞으로 기회 있는 대로 한시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초보자들을 위하여 각 한자의 평측은 물론 독음까지 달고, 각 시편마다 어려운 한자에 대한 풀이는 물론, 간간이 시율도 설명함으로써 누구나 좀 더 쉽게 한시에 접근할 수 있는 길잡이 한시집으로 다시 출간해 볼 생각임을 미리 밝혀 둔다. 아울러, 이 책의 각 시편마다 엄격한 한시의 염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반 시작법이나 시율 등에 어긋남이 없도록, 필자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한 것으로 자부하고 싶다. 하긴, 파격적인 예술작품은 이론을 무시한다지만, 아무쪼록 한시 고수님들의 따끔한 일침을 기다리면서 정중히 두 손을 모은다.
서기 2020년 5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