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속에 축적된 과학지식에서의 평균적 역량과 아름다움을 생활 속에 자연화시키는 감수성의 질-아름다움이 없는 도덕은 거친 소음만을 낳는다-이 없이는 선진문화 민주구가가 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평화와 평안이 있는 곳을 찾으면서 필자가 조용히 할 수 있는 바른 일은 과학지식의 축적과 아름다운 감수성의 질을 닦아나는 것뿐이리라 생각한다.
철학은 세상과 인생을 읽는 사유학이므로, 그 사유학은 사유를 하는 사람의 수준과 차원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사유하는 사람의 차원이 철학 공부에서는 중요한 문제로 등록된다. 과학 연구에서는 과학자의 개인적 사유 차원은 별로 문제삼지 않는다. 단지 과학자가 객관적인 방법에 철저하면, 과학자의 마음의 지평과 차원은 별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 공부에서는 사유하는 자의 수준과 지평과 방향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 글을 그것을 은폐하지 않고 현시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지평과 차원으로 글을 쓰려고 하는지 행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끔 나의 소신을 드러냈다.
나는 결국 노자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다.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연구서는 이미 아주 많이 나와 있고, 제각기 특성을 갖고 있다. 내가 여기서 다시 그 많은 저술들과 유사한 책을 펴내는 것은 낭비이다. 내가 새로이 쓰려는 것은 왜 노자가 지금 21세기에 불교와 더불어 우리의 철학적 사유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일이다. 더불어 지금의 철학적 사유가 왜 과거와 다르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서양인들이 동양철학을 동양인들보다 더 잘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동양인이 서양철학을 서양인보다 더 잘 해석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는가? 이 말은 이제 21세기에서 구태의연하게 '동양철학/서양철학'의 그런 칸막이가 점차로 무의미해져 간다는 뜻이다. 오직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만이 경제과학시대의 올가미에 씌워진 인간을 인간으로서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
우리는 언제까지 캄캄한 한밤중인양 잠만 잘 것인가? 21세기의 철학적 사유는 융합(fusion)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정신문화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창조적 사유의 사색을 함양해야 한다. 그런 사색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다르고 같은지를 동시에 보는 깊은 근거로부터의 사유가 절실히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