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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유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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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상상력에 권력을 권력에 상상력을>

상상력에 권력을 권력에 상상력을

상상력 - 권력, 전체로서의 우주-되기 “상상력을 가진다는 것은 세계를 그 전체성 속에서 바라본다는 뜻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말이다. 이 말에는 지난 몇 년 동안 심리적 현실에서 후퇴하고 있던 나를 앞으로 나가게 밀어준 힘이 들어있다. 그 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 글쓰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거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그래서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다. 이 책이 오랜 희원을 실현해주었다. 물론 책의 제목은 반세기 전, 프랑스 학생들의 외침을 빌어온 것이다. 정치가들이 권력의 향배를 논하기 바쁠 때, 거리에서 터져 나온 이 순진한 구호는 오늘날에도 사상적 영구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전체를, 전체의 파산과 신생(新生)을 정신의 저변에 깔고 있을 때만 ‘혁명’이란 말을 쓸 수 있다. 전체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전체란 불가능이다. 우리는 우주의 끝까지 가보지 못했고, ‘소우주’라는 신체에 대해서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우주 전체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우리의 무의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꿈꾸려고 애쓰는 유전자로 프로그래밍 된 건 아닐까. 그 무의식에 대해 엘리아데는 상상력을 통해 전체를 보라고 말했고, 프랑스 학생들은 가장 절박한 거리의 시간들 위에서 상상력에 권력을 부여하라고 외친 것이리라. 불가능인 전체를 ‘불가능한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식이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가 부족하더라도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상상은 자유롭다. 상상은 전체를 껴안으려는 욕망이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식으로 말하자면, 상상은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사유의 민주주의다. 상상력을 갖고 그것을 펼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상상력의 ‘힘’은 이미 그 안에 들어있다. 상상력 안의 힘, 즉 권력은 외재적인 헤게모니가 아닌 내재적인 ‘힘에의 의지’다. ‘권력’이 내재적인 의미를 얻으면 <상상력에 권력을-권력에 상상력을>이라는 두 방향의 운동이 시작된다. 힘에의 의지가 상상력과 권력 사이에 순환하며 차이와 반복을 낳는 가운데 권력과 상상력은 서로를 돕고 보충한다. 두 방향의 운동은 전체를 향한다. ‘불가능한 가능’이라는 전체의 역설이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역설은 움직이자마자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운동으로 바뀐다. 이 운동의 작용 속에서 전체는 실현되면서도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생성으로 충만한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움직이는 전체다. 미완성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우주의 장소성이란 ‘거기-여기’다. ‘거기-여기’는 상상력과 권력이 영원 회귀하는 거대한 의미의 세계다.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다. 세계가 사건으로 들끓어 넘치고 분자적 탈주선이 별빛을 다 가릴 정도로 빽빽한 거미줄을 허공에 그어 놓았더라도 의미는 아직 표현되지 않고 있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충만한 미완성으로서 전체인 우주를 한 붓으로 갈음했다. ‘우주 만물은 글월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이다.’ 연암에 따르면 우주는 쓰여지기를 기다리는 문장이다. 마지막 퍼즐을 채울 주인공이 나타났다. 누구인가. 연암이 말한바 글월,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야말로 전체인 우주에 두 방향으로 다가가 의미를 생성하는 상상력과 권력이다.’ 연암의 은유는 그렇게 천명하고 있다. 이제 조금은 알 듯도 싶다. 상상력과 권력의 언어를 통해 우주 전체를 내재화한 그 사람을 가리켜 소우주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 어디서 우주의 실상을 만날 수 있겠는가. 이 서문은 표현과 형식 두 면에서 처음보다 나중이 과잉되고 있다. 아무려면 어떠랴. 글쓰기란, 그것을 하는 이가 <상상력에 권력을 권력에 상상력을> 생성하는 전체로서의 우주-되기인 것을. 2020년 12월 20일 안골 서재에서 저자 씀 -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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