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아일랜드 나반에서 출생한 피어스 브로스넌은 부모의 이혼으로 친척집을 전전하며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다. 그리고 12살 되던 해인 1964년에 영국에 정착한 어머니가 그를 데려가지만, 이후에도 그의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아일랜드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가난으로 고통받던 피어스 브로스넌은 소년 시절부터 갖가지 직업을 전전했고, 결국 마지막 직업으로 연기를 하기로 맘먹는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런던 연극 센터에서 3년간 연기 수업을 받고 연출자로 활동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연극 무대의 피어스 브로스넌을 발견하고 그의 연극에 피어스 브로스넌을 출연시킨다.
이후 런던의 연극 무대와 상업광고, TV 드라마 등에 얼굴을 비췄지만, 피어스 브로스넌이 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미국 ABC TV가 제작한 <매니언 인 아메리카>이다. 이 드라마는 아일랜드 파업 선동가의 삶을 다룬 6부작 미니시리즈였는데 이 작품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은 주인공 매니언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이 작품으로 평단으로부터 “타이론 파워 주니어, 워렌 비티, 제임스 딘의 젊은 시절과 비교될만 하다”는 좋은 평가를 얻었다.
스테파니 짐발리스트와 호흡을 맞춘, 또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시리즈물 <레밍턴 스틸>을 통해 피어스 브로스넌은 “새로운 캐리 그랜트의 탄생”이란 영광스러운 평가와 함께 “제임스 본드와 형사 콜롬보의 적절한 혼합”을 이루어냈다는 비평도 얻어냈다.
1986년, 존 맥티어넌의 첫번째 영화 데뷔작 <유목민들>을 통해 영화배우로 성공적인 변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그에겐 정말 황금 같은 기회라 할 수 있는 <007 리빙 데이라이트>의 출연 제의가 들어왔지만, <레밍턴 스틸> 계약을 해지할 수 없었기에 수락하지 못한다. 만일 당시 인기 하락세로 고전 중이던 <레밍턴 스틸>이 그의 발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관객들은 “숀 코너리 이후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불리는 피어스 브로스넌을 일찌감치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를 흘려보내 버린 브로스넌은 이후 TV 드라마의 주연과 스크린의 조연을 오가며 다시 찾아올 기회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지는 영화들은 B급 액션 영화들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1994년 제임스 본드 역할에 대한 대중 투표로 인해 피어스 브로스넌은 본드 역을 차지하게 되다.
<007 골든 아이>부터 제임스 본드 역을 맡게된 피어스 브로스넌이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 불리게 되는데 이는 작품의 흥행 성적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007 골든 아이>가 전 세계에서 3억 5천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렸고, <007 네버 다이>가 미국 내 흥행 수익에서 전작 <007 골든 아이>를 가뿐히 넘어선 것도 큰 몫을 했다. 또한 브로스넌의 세 번째 제임스 본드 작품인 <007 언리미티드>는 007 시리즈와 MGM 스튜디오 역사상 최고의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를 기록해냈다.
007 시리즈에서 스타로 발 돋움한 피어스 브로스넌은 이후 <단테스 피크>,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등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스타성를 보여준다. 또한 가족멜로드라마 <에블린>은 피어스 브로스넌이 지금까지 해온 스타 고정 이미지와는 조금 동떨어진 작품이지만, 스스로 작품에 프로듀서로 참여할 만큼 자신의 애정을 듬뿍 담은 영화임과 동시에 피어스 브로스넌이란 이름의 인생과 가장 닮아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1991년, 1996년 <피플> 매거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 인’으로 뽑혔으며, 2001년에는 ‘현존하는 가장 섹시한 남자’로도 선정된다. 007 시리즈가 추억 속의 영화라고 생각될 즈음 확실하게 제임스 본드를 부활시킨 피어스 브로스넌은 이제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