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프랑스 영화계의 원로급 배우인 모리스 도르레악(Maurice Dorleac)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배우의 길을 택했으며, 언니인 프랑소와즈 도르레악(Francoise Dorleac)과 함께 10대 시절부터 영화출연을 시작했다. (언니는 배우로 별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녀는 67년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언니와는 달리 어머니의 처녀 시절 성인 드누브(Deneuve)를 예명으로 쓴 그녀는, 1956년에 < Les Collegiennes>라는 영화로 데뷰했으며 여러편의 하이틴물에 출연을 했다. 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시기의 출연작은 1960년의 < Les Portes Claquent>를 비롯한 평범한 영화들이었고, 옴니버스영화 < Les Parisiennes>의 한 에피소드에 출연한 것이 그중 가장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마침내 1964년에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쉴브룩의 우산>. 이른바 "시네 오페라"라는 획기적인 작품을 구상하고 있던 신예 감독 자크 드미(Jacques Demy)는 여주인공 주느비에브 역으로 참신한 신인 여배우를 물색하다가 그녀를 발탁한 것이다. 운명의 장난에 의해 결국은 맺어지지 못하는 젊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아름다운 화면과 수려한 음악에 실려 펼쳐지는 이 작품은, 자체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칸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지만 여주인공 그녀도 그 요정같은 미모에 못지않는 독특한 개성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프랑스 영화계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얼굴로 주목을 받았다.
그후 그녀는 로만 폴란스키, 루이즈 브뉴엘 같은 명감독들의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로 6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들중 한명으로 확고부동한 위치를 이루었다. 그리고 프랑스 영화만이 아니라, 68년에 영국으로 초빙되어 촬영한 <비우>를 계기로 해서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69년에는 헐리우드 영화에도 데뷰를 한다. 헐리우드는 그녀의 첫 작품을 대스타인 잭 레몬 과 공연하게 함으로써 그녀의 가치를 인정해주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수많은 작품들에 출연을 하기 시작했으나 60년대 같은 명품들은 그렇게 많이 탄생시키지는 못하였다. 20대 시절의 매력을 잃어가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으나, 프랑스의 명감독들이 중년에 접어든 그녀의 또다른 매력을 간과할리가 없었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명작 <마지막 지하철>에 출연한 그녀는, 젊은 유망주(당시에는) 제라르 드파르듀 와 짝을 이루어 눈부신 명연으로 자신의 진가를 다시한번 입증하며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그녀는 제2의 전성기를 다시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시절 아쉬웠던 것은 그녀의 작품들이 국내에는 별로 소개가 되지못한 점이었다.
프랑스 영화계가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해 제작한 <인도차이나>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그녀는 대배우의 관록을 여지없이 보여준 또한번의 명연으로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을 당당하게 수상하고, 아카데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그녀는 지금 쟌느 모로(Jeanne Moreau)와 함께 프랑스 영화계를 이끄는 최고 원로의 여배우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사진작가인 데이빗 베일리(David Bailey)와 결혼을 한적이 있으나 짧게 끝났고, 1960년 에 출연하면서 각본을 쓴 로제 바딤(Roger Vadim)을 만나 그와 동거생활을 하면서 아들 크리스티앙을 낳았다. 크리스티앙 바딤(Christian Vadim)은 어머니 쪽을 더 닮았는지 수려한 용모를 가지고 있어서 1983년에 배우로 데뷰하였다.
바딤과 헤어진 후에는 이태리를 대표하는 남우인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Maecello Mastroianni)와 오랫동안 동거생활을 하면서 딸 하나를 낳았고, 그와의 동거생활을 청산한 후에는 82년에 세르쥬 겐스부르(Serge Gainsbourg)와 염문을 일으켜서 그의 부인 제인 버킨(Jane Birkin)과 이혼 일보직전까지 몰고갔으나 겐스부르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