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차례나 아카데미상을 휩쓸고, 10번이나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된 화려한 경력.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거장' 감독.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감독이자 제작자.
하지만 코폴라만큼 심한 부침과 영욕을 경험한 사람도 드물다. 그의 전성기는 70년대였다. <대부>로 영화사의 흥행기록을 깨며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도 비평적 찬사를 잃지 않았고, 미국에서 예술영화 붐이 일었던 70년대 중반에는 미국 예술영화의 최전선에서 <대화> 같은 걸작을 빚어냈다가 <지옥의 묵시록> 이후엔 상업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몰락한 뒤, 안간힘을 써왔지만 다시는 70년대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코폴라는 마틴 스콜세지,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영화악동(무비브랫)으로 불렸다. 현장이 아니라 대학에서 먼저 영화를 배운 엘리트 영화광 출신답게 이들은 유럽예술영화풍의 작가주의영화나 영화사적 지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영화를 선보였다.
아버지 카마인 코폴라는 관현악단 지휘자였다.(후에 아들이 감독으로 출세하자 영화음악가로도 활동했다) 홉스틀러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다가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옮기면서 영화로 바꾸었다. 학생 시절에 이미 소형영화들을 감독했고, 미국 'B'급 영화의 거장 로저 코만(Roger Corman) 감독 밑에서 실력을 쌓았다. 66년에 < You're A Big Boy Now >라는 영화로 감독데뷰를 하며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 계속해서 < Finian's Rainbow >(68), <빗속의 여인(The Rain People)>(69) 등의 수작을 발표했으나, 시대를 앞서가는 연출감각 탓인지 흥행은 신통치 못했다.
UCLA에서 영화학 석사학위를 받은 코폴라는 무비브랫 중에서도 가장 지적인 배경을 지녔다. B급영화의 대부인 로저 코먼에게서 영화실무를 배웠다. 70년에는 <팻튼 대전차 군단(Patton)>의 각본을 맡아 에드먼드 H.노스와 함께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고, 헐리우드 메이저와 첫 인연을 맺은 뒤에도 몇 작품의 상업적 실패를 맛보고 있던 코폴라는 마침내 1972년 <대부>를 만들어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대부>의 대성공으로 예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한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지금까지 고집해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굴곡이 심하다.
그에게 아카데미 작품상(직접 제작을 했다), 감독상, 각색상의 3개를 안겨준 <속 대부(The Godfather Part II)>(74),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한 도청 소재의 영화 <컨버세이션>(74), 40년대 자동차 설계가 프레스튼 턱커의 일대기 <터커>(88) 등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에 뮤지칼에 도전한 <마음의 저편>(82), 복고풍의 드라마 <코튼 클럽>(84) 등은 혹평과 팬들의 외면을 받아야 했다. 코메디에 도전한 <페기 수 결혼하다>(86)는 캐슬린 터너와 니콜라스 케이지의 열연이 그의 별볼일 없는 연출을 살려주었다는 평을 감수해야만 했다.
79년도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은 월남전을 장대한 스케일로 그리면서도 형이상학적인(정신분석 또는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지금도 그 작품성에 대해서 논란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또한 청소년 드라마인 <아웃사이더>(82), <럼블 피쉬>(83)는 그의 진지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과연 청소년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린 작품이냐 하는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90년에 야심적으로 공개한 <대부 3>가 실패로 돌아가자 상당히 실망을 했다. 그러나 <드라큐라>를 원작에 충실한 정통파 공포영화를 목표로 호화배역으로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