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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계 현정"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일본표해록」 말미에서 스스로 ‘능주綾州 쌍봉사雙峰寺의 승려’라고 하였으므로 쌍봉사 출신의 스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그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있다. 화원승畵員僧으로 광주의 원효사元曉寺에 있었다. 해남 대둔사의 천불상千佛像을 경주의 석굴암에서 만든 지 여러 해 만에 일이 끝나서 배에 싣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서 일본의 장기도長崎島에 정박하게 되었다. 그런데 싣고 있던 천불상이 홀연히 광명을 나타내니 일본 사람들이 대단히 이상히 여기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대로 3년을 머물다가 돌아와서 표해록漂海錄을 지었다. 그 제자 해운이 또한 화원으로서 세상에 이름났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현정은 당시에 화원으로 이름난 승려였던 것 같다. 대둔사에서 천불을 조성하면서 그에게 의뢰한 것에서 그의 명망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쓴 <천불조성약기千佛造成略記>(「범해선사문집梵海禪師文集」, 「한국불교전서」 제10책)에서도 확인된다. <천불조성약기>에 의하면, 현정이 천불을 조성할 때 처음에 京山 화원 8명으로 일을 시작하였지만, 점안을 할 때는 경산 화원 9명, 영남嶺南 화원 24명, 전라도全羅道 화원 11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 영남과 호남의 화원 수십 명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가진 화원승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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