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논저로는 『김소월 시의 리듬 연구』, 『이상 문학의 재인식』(공저), 『돔덴의 시간』(평론집) 등이 있다. 최근까지 한국 근현대시가 지닌 다양한 리듬의 양상을 분별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리듬론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면목(面目)
등단의 자리에서 면목이 되는 글을 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깜냥이 되지 않는 자의 주제넘은 말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글의 면목이란 쓰기의 과정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어찌할 것인가? 나의 글들이 다시금 나를 응시하는 사태 앞에서 무엇을 더 감당할 수 있는가? ‘평생 그 응시 속에서 나의 면목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예전의 소감을 다시 소환하는 건 또 얼마나 면목 없는 일인가. 이제 나는 이중의 곤혹 앞에서 두렵다.
넘어지다
어느 좌담회에서 시에 걸려 넘어진 자의 초라한 행색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쓰러져 있을 수만은 없다고 강변한 것, 평론가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첨언한 것은 비루한 일이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건, 나를 넘어뜨리는 게 다름 아니라 나의 글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나는 ‘생리의 무두질’에 집중했다. 살과 가죽의 사이를 찾아 안팎을 가르는 무두질은 고역이었으되, 그것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착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투른 ‘생리의 무두질’에 고착되어 있다가, “나를 내지르는 힘의 충직한 방향과 속도”의 시(김언희, '공') 앞에서 다시 쓰러진 적이 있다. 거기서 내가 건져 올린 건 돔덴(Domden)이라는 하나의 단어였다.
시간
돔덴의 시간을 산다. 이 말에 돔덴이고자 하는 뜻이 섞여 있다면, 그건 시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돔덴의 시간을 사는 것은 차라리 시인이다. 그들은 빠르거나 느리게, 혹은 격하거나 부드럽게, 하지만 충직하게 돔덴의 시간을 산다. 시는 시인에 의해 천장(天葬)된 생의 지체들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시인이 시에 의해 천장된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만약 나의 글이 감히 돔덴의 시간을 전유하였다면, 그건 바로 후자와 관련되는 한에서만 간신히 그러할 뿐이다. 시의 넓고 깊은 세계를 주유하면서 행여 이물이 씹힌다면, 그건 온전히 넘어진 자의 것이다. 그러니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 이물은 무례의 산물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보는지 모르는 자의 실수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