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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객자는 운고(雲高) 또는 운초(雲樵)이며, 운태(雲台), 이암(伊庵), 태평양객(太平洋客), 무애생(無涯生), 해천(海天) 등의 별호와 필명을 사용하였다. 광동성 귀선현[歸善縣: 오늘날의 혜양(惠陽)]이 고향이다. 강유위(康有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청나라 광서 23년(1897)에 <지식보(知識報)>, <시무보(時務報)> 등의 편집을 담당하여 변법의 정신을 전파하는 데 힘쓰는 한편, 호남시무학당(湖南時務學堂)의 교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무술변법 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가 양계초를 도와 <청의보(?議報)>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역대혁명설략(中國曆代革命說略)>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1903년에는 <대동일보(大同日報)>의 총편집을 담당하고, <신광동>을 써내어 광동의 독립을 주장하였으나, 후에 손문을 공격한 것으로 인해 배척을 당하였으며, 이후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 귀국하였으나, 강유위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1911년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신광동>, <환구일기(環球日記)> 등의 저서를 남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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