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41년에 에게해 근방에 위치한 사모스 섬에서 태어나 18살에 아테네로 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문법학교 교사 네오클레스로 아테네 시민이었다. 14세 때 철학을 접했는데, 문법학교 교사들이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글에 나오는 ‘카오스’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철학에 입문, 데모크리토스의 책들을 읽으며 철학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18살 되던 해 아테네로 온 에피쿠로스는 상당 기간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고 나서, 아나톨리아의 람프사코스에서 학교를 열었다. 32살에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거기에 있는 “정원”(κῆπος, ‘케포스’)에서 철학 토론을 하며 오랜 세월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전파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처음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스 본토를 넘어 지중해 세계 전체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로마의 정치가이자 대중연설가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폭풍처럼 로마를 집어삼켰다”라고 한탄했다.
주요 사상인 ‘쾌락주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은 방탕과 욕망 충족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음을 강조하여 자연주의 철학과 마음돌봄 조류의 선구자가 되었고, 관찰과 추론에 대한 확고한 주장으로 과학적 사고법의 시조로 인정받는다. 그는 이후 500년 동안 지중해에서 가장 존경받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경멸받는 철학자였다. 에피쿠로스학파는 600년 정도 지속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현대의 자연철학과 평등주의, 미니멀리즘 사상에도 정신적 배경이 되어주는 등 그 영향력은 여전히 견고하다.
에피쿠로스는 방광에 돌이 생겨 14일 동안 앓았으며 72세(기원전 270년)에 죽었다. 그의 학교는 고대 그리스 철학 학파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여성을 받아들인 최초의 학교였다. 학교 정문에는 “나그네여, 이곳에서 우리의 최고선은 쾌락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