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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응자는 용여(龍汝), 호는 연경재(硏經齋)·난실(蘭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집안 대대로 경기도 포천 지역에 거주한 그의 가문은 5대조 성후룡(成後龍)이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金尙容)의 서녀(庶女)와 혼인하면서 서족이 되었다. 안동김씨 집안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성해응의 종고조인 성완(成琬), 종증조 성몽량(成夢良), 부친 성대중(成大中)이 3대를 연이어 통신사행에 참여했을 정도로 문학적 역량을 공인받은 집안이었다. 이처럼 성해응 집안은 제술관과 서기 등 세직으로서 통신사행에 참여하고, 7대에 걸친 연이은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하며 조선 후기 서족명문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성해응은 24세 되던 1783년(정조 7)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29세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중앙에 진출했으며, 1800년까지 줄곧 검서관으로 재직하면서 각종 국가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이후 상의원별제, 통례원인의, 금정찰방, 음성현감 등을 거쳐 1815년에 고향 포천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150여 권에 달하는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을 저술했는데, 18~19세기의 학문과 사상, 문학, 역사, 지리, 서화, 고동(古董)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백과전서식의 저술로 자료적 가치가 크다. 1839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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