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송강(松江)의 한시(漢詩)를 위하여
송강의 시를 감상하려면 작가가 어떤 분인지 먼저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간단히 소개 하려고 한다. 송강은 1536년 윤 12월 6일 서울 장의동(현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돈영부 판관 정유침과 죽산 안씨의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의 막내여서 남부럽지 않았는데 10세 되던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부친은 귀양을, 전도유망하던 큰형은 귀양길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는 등 풍비박산이 되었다.
송강을 일러 서인의 영수라고 하는데 그렇게 불린 것은 사후일 것이다. 행록을 보면 부모의 상을 당하여 시묘사리 하는 6년 동안 붕당이 시작되었고 복직하고는 이를 중단 시키려고 동분서주하다 뜻을 못 이루고 1차 낙향했다. 2년 후 복귀 했으나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측에서는 눈엣가시처럼 생각되어 탄핵을 일삼았다. 9개월 만에 다시 2차 낙향했는데 임금은 몇 달 후 강원 관찰사를 내리셨다. 직무 마치고 내직으로 옮기자 또 시작된 탄핵으로 얼마 못 버텼다. 언제나 혼자인 송강은 3차 낙향하고 임금은 전라관찰사를 내리셨다. 직을 마치고 내직으로 옮겨 3년 여 임금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지만 빗발치는 탄핵에 다시 보따리를 싸 담양으로 내려갔다.
4년 여 그곳에 머물면서 송강정을 짓고 장진주사와 사·속미인곡을 짓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589년 장자가 요절하여 장례 치르려고 상경하여 머무는데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나라의 변괴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임금을 찾아뵈었다가 우의정 겸 위관을 맡아 일선에 나섰다. 그렇게 나라를 위해 일하는데, 같은 반열의 정승들의 꼬임에 빠져 세자책봉을 건의 했다가 임금의 진로를 사 귀양살이에 들어갔다.
처음 귀양지는 충남 광천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경남 진주로 옮겨졌다. 그 곳에 도착하기 바쁘게 따뜻한 기후라며 함경도 강계로 옮겨져 위리안치 되었다. 귀양생활 10개월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모두 풀어주면서도 송강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몽진 중인 개성에서 민심을 살피려는 임금에게 민중이 건의하자 피치 못하고 확답하여 풀렸고 평양에서 임금과 만났으며, 1592년 9월 양호체찰사가 되어 임지로 떠났으나 그 가운데도 논척하였다.
1593년 5월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 서울에 갔는데 다시 논척을 입었다. 임무 중에도 사실을 알리는 글을 수 차례 올렸지만, 11월 귀국하여 보고하려 하자 외면하고는 강화도에서 기다리라는 귀띔을 받았다. 섬에 들어가 한 달 여 만인 12월 18일 영면하여 1594년 2월 양친과 장자와 같이 묻혔는데, 그때부터 기축옥사에서 하지도 않은 일을 임금이 앞장서서 온통 씌우는 바람에 오명을 뒤집어쓰고 지금까지도 유언비어에 묻혀 있다. 하여튼 편히 누워있을 처지가 안 되자 후손은 1665년 3월 현재 계신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으로 천장하였다.
나는 이처럼 파란만장한 송강의 삶의 현장을 찾아 탐사하면서 특히 17대의 후손으로서 <이야기가 있는 송강 정철 한시>를 집필한 바 그간 <국제문단> <한빛문학> <서울문학> 등에 계속 연재를 하게 됨으로써 세 잡지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또한 어려운 여건에도 출판을 맡아 준 광진문화사의 유차원 사장님과 꼼꼼히 편집작업에 수고해 주신 이은집 작가님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