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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정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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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이야기 사미인곡>

정순택

·송강문화 선양회 간사
·2020년 현, 영일 정씨 문청공파 종중 총무
·『제례홀기』 번역, 일신서적, 2006
·『이야기가 있는 송강 정철 한시』 1집, 광진문화사, 2017
·선각자 정안립, 예술의 숲, 2010
·조국의 품에 안긴 정안립 전단지, 예술의 숲,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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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이야기가 있는 송강 정철 한시> - 2017년 4월  더보기

이야기가 있는 송강(松江)의 한시(漢詩)를 위하여 송강의 시를 감상하려면 작가가 어떤 분인지 먼저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간단히 소개 하려고 한다. 송강은 1536년 윤 12월 6일 서울 장의동(현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돈영부 판관 정유침과 죽산 안씨의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의 막내여서 남부럽지 않았는데 10세 되던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부친은 귀양을, 전도유망하던 큰형은 귀양길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는 등 풍비박산이 되었다. 송강을 일러 서인의 영수라고 하는데 그렇게 불린 것은 사후일 것이다. 행록을 보면 부모의 상을 당하여 시묘사리 하는 6년 동안 붕당이 시작되었고 복직하고는 이를 중단 시키려고 동분서주하다 뜻을 못 이루고 1차 낙향했다. 2년 후 복귀 했으나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측에서는 눈엣가시처럼 생각되어 탄핵을 일삼았다. 9개월 만에 다시 2차 낙향했는데 임금은 몇 달 후 강원 관찰사를 내리셨다. 직무 마치고 내직으로 옮기자 또 시작된 탄핵으로 얼마 못 버텼다. 언제나 혼자인 송강은 3차 낙향하고 임금은 전라관찰사를 내리셨다. 직을 마치고 내직으로 옮겨 3년 여 임금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지만 빗발치는 탄핵에 다시 보따리를 싸 담양으로 내려갔다. 4년 여 그곳에 머물면서 송강정을 짓고 장진주사와 사·속미인곡을 짓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589년 장자가 요절하여 장례 치르려고 상경하여 머무는데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나라의 변괴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임금을 찾아뵈었다가 우의정 겸 위관을 맡아 일선에 나섰다. 그렇게 나라를 위해 일하는데, 같은 반열의 정승들의 꼬임에 빠져 세자책봉을 건의 했다가 임금의 진로를 사 귀양살이에 들어갔다. 처음 귀양지는 충남 광천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경남 진주로 옮겨졌다. 그 곳에 도착하기 바쁘게 따뜻한 기후라며 함경도 강계로 옮겨져 위리안치 되었다. 귀양생활 10개월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모두 풀어주면서도 송강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몽진 중인 개성에서 민심을 살피려는 임금에게 민중이 건의하자 피치 못하고 확답하여 풀렸고 평양에서 임금과 만났으며, 1592년 9월 양호체찰사가 되어 임지로 떠났으나 그 가운데도 논척하였다. 1593년 5월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 서울에 갔는데 다시 논척을 입었다. 임무 중에도 사실을 알리는 글을 수 차례 올렸지만, 11월 귀국하여 보고하려 하자 외면하고는 강화도에서 기다리라는 귀띔을 받았다. 섬에 들어가 한 달 여 만인 12월 18일 영면하여 1594년 2월 양친과 장자와 같이 묻혔는데, 그때부터 기축옥사에서 하지도 않은 일을 임금이 앞장서서 온통 씌우는 바람에 오명을 뒤집어쓰고 지금까지도 유언비어에 묻혀 있다. 하여튼 편히 누워있을 처지가 안 되자 후손은 1665년 3월 현재 계신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으로 천장하였다. 나는 이처럼 파란만장한 송강의 삶의 현장을 찾아 탐사하면서 특히 17대의 후손으로서 <이야기가 있는 송강 정철 한시>를 집필한 바 그간 <국제문단> <한빛문학> <서울문학> 등에 계속 연재를 하게 됨으로써 세 잡지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또한 어려운 여건에도 출판을 맡아 준 광진문화사의 유차원 사장님과 꼼꼼히 편집작업에 수고해 주신 이은집 작가님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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