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중요한 주제와 논쟁의 한 가운데 자리했던 학자요 수도자가 바로 다마스쿠스의 요한이었다. 그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요한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635년에 다마스쿠스가 비교적 상처를 입지 않고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가교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할아버지 만수르(Mansour ibn Sarjun)는 지역의 세금관리자로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존 만수르(Mansour ibn Sarjun) 역시 세습이 가능한 궁정의 세금관리자로 살면서, 아들 존에게 비교적 다양한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
요한의 집안이 아랍 출신의 시리아 기독교 가족이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 요한은 시칠리아의 고아 출신인 코스마스(Cosmas)와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같이 교육을 받았다. 요한은 그의 나이 만 50세 어간이던 725년에 아버지의 직을 이어 일하던 궁정에서 사직하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인근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베들레헴에서 남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르사바(Mar Saba) 수도원에 안착했고, 이후 735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법과 신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수도생활과 작품활동에 전념했고, 교회 예전에 쓰이는 찬송가 작곡가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쓴 찬송가는 지금도 부활절에 비잔틴기독교뿐만 아니라 루터교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