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다가 눈에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런 날, 저는 그 틈새 장을 비집고 아득한 길을 여행자가 되어 펼쳐봅니다.
‘별밤’에 소박한 엽서를 보내고 신청 곡이 흘러나오길 라디오에 귀를 쫑긋하던 날과 홀연히 만난 소낙비를 흠뻑 맞고 전율하던 날 함께한 가로등과 손가락에 번호를 매기며 손글씨에서 필요로 자판 연습에 몰입했던 날이 훅 다가와 풍성하게 심연을 뒤흔듭니다.
그리고 생각해봅니다. 나의 최초의 기억은 무엇일까? 그러면 사진으로 전해지는 엄마 품에 안긴 정지된 모습과 달리 기차 소리가 들립니다. 어디를 지나는지 차창으로 빛이 쏟아지는 여부에 따라 창은 색을 달리해 보여줍니다. 신기한 것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기차역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저에게 기차를 태워준 적이 있냐고 물어도 속 시원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저의 첫 소설집에 아홉 편의 단편을 엮었습니다.
표제 작품인 「풍란」은 제주 펜션에서 뭍으로 오게 된 풍란의 여정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모습 및 고통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금성의 똥꼬」는 강원도 삼척시가 배경으로 주인공 금성과 그의 아내와 딸, 세 화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가족의 치매에 대한 갈등과 애정을 담고 있습니다. 더불어 금성의 심리 속에 숨겨져 있던 어린 날 금성의 6.25 전쟁의 상흔까지 드러냅니다. ‘똥꼬’는 망둑엇과의 민물고기로 강원도에서는 똥꼬, 꺽저구, 꾹저구 등으로도 불립니다.
「천국의 장미」는 근육종을 진단받은 수도자와 그 죽음까지의 과정을 뒤쫓으며 바라본 인간의 매몰참과 울분, 연약함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진지한 물음을 담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시계추」는 경직된 조직 속에서 소외되고 개체화된 현대인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멍울진 바다」는 대학 졸업 후 결핵으로 안개 같은 시간을 보내던 해수가 경포 바다에서 만난 사람들과 유일한 탈출구로 여기며 떠난 춘천, 서울, 부산에서 접한 암울한 세상과의 또 다른 괴리감 속에서 사회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습니다.
「안녕하신가요?」는 갑작스러운 코로나19 시대의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변화된 일상과 잊고 살았던 사회성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되짚고 있습니다.
「약속」은 젊은 날 무정자증을 숨기고 결혼한 남자의 부인과 한 약속을 되돌아보며 현대인의 결혼에 대해 반추해 봅니다.
「어깨놀이 변주곡」은 오십 대 소상공인이 20대 아들에게 경제 개념을 심어주고자 권한 주식으로 인해 벌어지는 가족 간의 좌충우돌과 불확실한 세계 정세를 담고 있습니다.
「치과 가는 날」은 썩어 문드러진 어금니 치료를 위해 치과에 다니는 희수를 통해 곳곳에 만연된 인간 사회의 비열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것이 사람 감정의 기억에까지 이를 때, 불현듯 다가오는 고통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 지점은 개인적, 가족적, 사회적 요소를 내포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더듬어 봅니다. 불완전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꼭짓점에서의 고통은 다시 희망의 씨앗이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자세히 바라보고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은 더욱더 고귀하게 지속되어야 합니다.
끝으로 글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도움을 주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3년 ‘중소 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 지원’ 공모사업의 심사위원님들과 흔쾌히 발문을 맡아주신 소설가 류재만 선생님, 푸른고래 출판사 오창헌 대표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일일이 호명할 수 없지만 저와 밥을 함께 하는 모든 식구에게 살뜰한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책 편지로 전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