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에서 인생을 연 뒤 유치원의 존재도 모르고 세종 아저씨 또한 뉘신지요 상태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했으나 뛰어난 지능(?)으로 1학년에 한글을 깨치고 4학년 2학기에 구구단을 정복했다. 친구들과 유치하게 노는 데 정신이 팔렸던 사춘기와 중학교 생활은 기억에서 지워졌고, 고교 때는 이성, 음주, 끽연, 당구, 정체성 확립, 인생의 의미 etc.
어찌 그리도 할 게 많았을까?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서야 학창 시절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책이라는 걸 처음 펼쳐봤고, 턱걸이로 대학 가고, 여차저차 해서 입시학원에 발을 들였다. 까탈스러우나 버리기 싫은 성격으로 인해 빈털터리 강사로 전국을 기웃거리기를 20여 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껴 지금은 고인(故人)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자주 살아만 있는 사람들이 내 여린 마음을 잔인하게 할퀴곤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이 아니라 말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누군가 음식이나 음료를 권할 때 “됐습니다”는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지만, “괜찮습니다”는 상대방의 성의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표현이다. 긍정이나 허락을 뜻하는 짧은 “네”는 괜찮지만, 길게 반복하는 “네~네~”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표현이 된다. 말하는 본인은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거나 무시하려는 ‘의도[뜻]’가 전혀 없었을지라도, 상대방은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게 중요하다.
자기의 ‘의도’가 좋거나 진지하다면, 그에 걸맞은 (어휘·억양·표정·제스처 등의 총칭인) ‘표현’ 역시 그만큼 고민하고 디자인해야 한다. 비싸게 산 옷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다니지는 않듯이 말이다. 내면과 외면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 한다는 것이고, 폼나게 말하자면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