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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민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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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D자주] 성서원 큰글자 쉬운말성경 - 특중(特中).단본.색인>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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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26일 출고 
세 여성 설교자의 아홉 편의 설교를 정독하면서 큰 기쁨, 미처 몰랐던 것에 관한 큰 배움, 내가 너무나도 안이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큰 뉘우침, 여기에 더하여, 지금 한창 활동하고 있는 여성 설교자들이, 암담한 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려고 하는지, 이 시대에 회개와 구원과 성도의 실천적인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깨우치기도 했다.
2.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26일 출고 
성경의 한 절도 생략함 없이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쓴 “확대판 성경” 스토리텔링 성경(성서원, 2018)이 출간되었다. 스토리텔링 성경은 이야기를 비롯해서 주석과 해설의 기능까지 함께 하느라, 본래의 성경본문보다 2-4배 정도 많은 분량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쉬운말 성경의 본문을 기준으로 해서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창 37-50장)는 그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200매다. 그런데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무려 500매로, 2.5배가 된다. 이처럼 분량이 늘어난 것은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이야기꾼이 성경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뿐만 아니라, 본문을 읽은 뒤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해 말씀에 대한 자신의 응답을 고백적으로 진술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런 감동이 독자의 감동과 서로 만날 때, 독자는 삶이 한층 풍요로워지는 말씀 나눔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자기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면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크나큰 은총과 복 받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성경>이 읽고 이해하기에 난해하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출간된 성경주석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 책인가를 반증한다. 스토리텔링은 그러한 난해함을 해소하려는 참신하고도 재밌는 방법이다. 이른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스토리(story) +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이야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스토리텔링은 여러 가지로 유익하고 설득력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스토리텔링은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있어 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스토리텔링‘한다는 것 자체가 왜 진즉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말로 때늦은 후회를 갖게 만들 정도로 아주 바람직한 작업이다. 본래 <성경>의 <말씀>은 책에 따라 길거나 짧거나 하는 구전(口傳) 기간이 있었다. 말씀을 전달하는 구전자가 있었고, 구전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이 있었고, 청중이 모이는 절기나 예배 같은 계기가 있어서 말씀이 선포되었다. 인류문화사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매체가 다양하게 발전되면서 구전이 기록(記錄) 전승으로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두루마리나 코덱스(Codex) 모양의 사본(寫本)이 생기게 된다. 그때부터 “듣는 말씀”은 “읽는 말씀”이 된다.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사본은 책(冊)의 형태로 발전한다. 작금에 와서 <성경>은 책의 형태에서 전자본문(電子本文)으로, 모바일 본문으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매체의 변화는 <성경>의 <말씀>이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제 독자들은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1,000여 개 이상의 번역본 중 자기가 원하는 언어를 골라서 언제 어디에서나 성경을 찾아 읽을 수도 있고, 읽어주는 본문을 들을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성경>은 만화로, 영화로, 그림이나 조각으로 그 메시지가 시각화되기도 하고, 음악이나 무용으로 표현되어 시청각을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매체들과 비교해 볼 때,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 형태’로 아주 쉽게 성경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된 훌륭한 시도다.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성경 내용을 간추리거나 주요 내용을 발췌한 요약 성경이 아니다. 심지어 성경의 병행본문까지도 일절 생략함 없이 매장, 매절을 따라가면서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 성경의 메시지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확대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본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10번 읽는 것보다 스토리텔링 성경을 한번 정독하는 것이 훨씬 낫다. 실제로 성경의 문학적 장르 중에는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이야기가 메시지 전달에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설명할 때 자주 이야기 방식으로 가르치셨다.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앞서 감수자는 저자가 성경본문을 이야기로 풀어나감에 있어 본문의 분량이 2-4배 정도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성경을 소화하고 새김질함에 있어서 독자들은 누구나 이처럼 자기식의 이야기로 풀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독자에 따라서는, 독자 개인의 상상력의 용량에 따라, 2-4배가 아닌 5배, 10배, 50배로 이야기를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1955)의 역작 요셉과 그 형제들(창세기 29-50장)이라는 장편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전6권이 2,919 쪽이다. 확대된 분량이 무려 70배에 이른다. 이럼에도 양방향 대화가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전혀 지루함 없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제 독자들도 이와 똑같은 체험을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
3.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26일 출고 
성경의 한 절도 생략함 없이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쓴 “확대판 성경” 스토리텔링 성경(성서원, 2018)이 출간되었다. 스토리텔링 성경은 이야기를 비롯해서 주석과 해설의 기능까지 함께 하느라, 본래의 성경본문보다 2-4배 정도 많은 분량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쉬운말 성경의 본문을 기준으로 해서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창 37-50장)는 그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200매다. 그런데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무려 500매로, 2.5배가 된다. 이처럼 분량이 늘어난 것은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이야기꾼이 성경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뿐만 아니라, 본문을 읽은 뒤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해 말씀에 대한 자신의 응답을 고백적으로 진술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런 감동이 독자의 감동과 서로 만날 때, 독자는 삶이 한층 풍요로워지는 말씀 나눔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자기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면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크나큰 은총과 복 받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성경>이 읽고 이해하기에 난해하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출간된 성경주석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 책인가를 반증한다. 스토리텔링은 그러한 난해함을 해소하려는 참신하고도 재밌는 방법이다. 이른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스토리(story) +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이야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스토리텔링은 여러 가지로 유익하고 설득력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스토리텔링은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있어 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스토리텔링‘한다는 것 자체가 왜 진즉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말로 때늦은 후회를 갖게 만들 정도로 아주 바람직한 작업이다. 본래 <성경>의 <말씀>은 책에 따라 길거나 짧거나 하는 구전(口傳) 기간이 있었다. 말씀을 전달하는 구전자가 있었고, 구전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이 있었고, 청중이 모이는 절기나 예배 같은 계기가 있어서 말씀이 선포되었다. 인류문화사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매체가 다양하게 발전되면서 구전이 기록(記錄) 전승으로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두루마리나 코덱스(Codex) 모양의 사본(寫本)이 생기게 된다. 그때부터 “듣는 말씀”은 “읽는 말씀”이 된다.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사본은 책(冊)의 형태로 발전한다. 작금에 와서 <성경>은 책의 형태에서 전자본문(電子本文)으로, 모바일 본문으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매체의 변화는 <성경>의 <말씀>이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제 독자들은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1,000여 개 이상의 번역본 중 자기가 원하는 언어를 골라서 언제 어디에서나 성경을 찾아 읽을 수도 있고, 읽어주는 본문을 들을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성경>은 만화로, 영화로, 그림이나 조각으로 그 메시지가 시각화되기도 하고, 음악이나 무용으로 표현되어 시청각을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매체들과 비교해 볼 때,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 형태’로 아주 쉽게 성경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된 훌륭한 시도다.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성경 내용을 간추리거나 주요 내용을 발췌한 요약 성경이 아니다. 심지어 성경의 병행본문까지도 일절 생략함 없이 매장, 매절을 따라가면서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 성경의 메시지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확대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본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10번 읽는 것보다 스토리텔링 성경을 한번 정독하는 것이 훨씬 낫다. 실제로 성경의 문학적 장르 중에는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이야기가 메시지 전달에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설명할 때 자주 이야기 방식으로 가르치셨다.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앞서 감수자는 저자가 성경본문을 이야기로 풀어나감에 있어 본문의 분량이 2-4배 정도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성경을 소화하고 새김질함에 있어서 독자들은 누구나 이처럼 자기식의 이야기로 풀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독자에 따라서는, 독자 개인의 상상력의 용량에 따라, 2-4배가 아닌 5배, 10배, 50배로 이야기를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1955)의 역작 요셉과 그 형제들(창세기 29-50장)이라는 장편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전6권이 2,919 쪽이다. 확대된 분량이 무려 70배에 이른다. 이럼에도 양방향 대화가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전혀 지루함 없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제 독자들도 이와 똑같은 체험을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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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한 절도 생략함 없이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쓴 “확대판 성경” 스토리텔링 성경(성서원, 2018)이 출간되었다. 스토리텔링 성경은 이야기를 비롯해서 주석과 해설의 기능까지 함께 하느라, 본래의 성경본문보다 2-4배 정도 많은 분량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쉬운말 성경의 본문을 기준으로 해서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창 37-50장)는 그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200매다. 그런데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무려 500매로, 2.5배가 된다. 이처럼 분량이 늘어난 것은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이야기꾼이 성경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뿐만 아니라, 본문을 읽은 뒤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해 말씀에 대한 자신의 응답을 고백적으로 진술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런 감동이 독자의 감동과 서로 만날 때, 독자는 삶이 한층 풍요로워지는 말씀 나눔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자기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면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크나큰 은총과 복 받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성경>이 읽고 이해하기에 난해하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출간된 성경주석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 책인가를 반증한다. 스토리텔링은 그러한 난해함을 해소하려는 참신하고도 재밌는 방법이다. 이른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스토리(story) +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이야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스토리텔링은 여러 가지로 유익하고 설득력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스토리텔링은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있어 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스토리텔링‘한다는 것 자체가 왜 진즉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말로 때늦은 후회를 갖게 만들 정도로 아주 바람직한 작업이다. 본래 <성경>의 <말씀>은 책에 따라 길거나 짧거나 하는 구전(口傳) 기간이 있었다. 말씀을 전달하는 구전자가 있었고, 구전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이 있었고, 청중이 모이는 절기나 예배 같은 계기가 있어서 말씀이 선포되었다. 인류문화사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매체가 다양하게 발전되면서 구전이 기록(記錄) 전승으로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두루마리나 코덱스(Codex) 모양의 사본(寫本)이 생기게 된다. 그때부터 “듣는 말씀”은 “읽는 말씀”이 된다.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사본은 책(冊)의 형태로 발전한다. 작금에 와서 <성경>은 책의 형태에서 전자본문(電子本文)으로, 모바일 본문으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매체의 변화는 <성경>의 <말씀>이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제 독자들은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1,000여 개 이상의 번역본 중 자기가 원하는 언어를 골라서 언제 어디에서나 성경을 찾아 읽을 수도 있고, 읽어주는 본문을 들을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성경>은 만화로, 영화로, 그림이나 조각으로 그 메시지가 시각화되기도 하고, 음악이나 무용으로 표현되어 시청각을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매체들과 비교해 볼 때,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 형태’로 아주 쉽게 성경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된 훌륭한 시도다.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성경 내용을 간추리거나 주요 내용을 발췌한 요약 성경이 아니다. 심지어 성경의 병행본문까지도 일절 생략함 없이 매장, 매절을 따라가면서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 성경의 메시지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확대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본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10번 읽는 것보다 스토리텔링 성경을 한번 정독하는 것이 훨씬 낫다. 실제로 성경의 문학적 장르 중에는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이야기가 메시지 전달에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설명할 때 자주 이야기 방식으로 가르치셨다.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앞서 감수자는 저자가 성경본문을 이야기로 풀어나감에 있어 본문의 분량이 2-4배 정도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성경을 소화하고 새김질함에 있어서 독자들은 누구나 이처럼 자기식의 이야기로 풀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독자에 따라서는, 독자 개인의 상상력의 용량에 따라, 2-4배가 아닌 5배, 10배, 50배로 이야기를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1955)의 역작 요셉과 그 형제들(창세기 29-50장)이라는 장편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전6권이 2,919 쪽이다. 확대된 분량이 무려 70배에 이른다. 이럼에도 양방향 대화가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전혀 지루함 없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제 독자들도 이와 똑같은 체험을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
5.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26일 출고 
성경의 한 절도 생략함 없이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쓴 “확대판 성경” 스토리텔링 성경(성서원, 2018)이 출간되었다. 스토리텔링 성경은 이야기를 비롯해서 주석과 해설의 기능까지 함께 하느라, 본래의 성경본문보다 2-4배 정도 많은 분량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쉬운말 성경의 본문을 기준으로 해서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창 37-50장)는 그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200매다. 그런데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무려 500매로, 2.5배가 된다. 이처럼 분량이 늘어난 것은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이야기꾼이 성경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뿐만 아니라, 본문을 읽은 뒤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해 말씀에 대한 자신의 응답을 고백적으로 진술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런 감동이 독자의 감동과 서로 만날 때, 독자는 삶이 한층 풍요로워지는 말씀 나눔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자기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면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크나큰 은총과 복 받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성경>이 읽고 이해하기에 난해하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출간된 성경주석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 책인가를 반증한다. 스토리텔링은 그러한 난해함을 해소하려는 참신하고도 재밌는 방법이다. 이른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스토리(story) +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이야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스토리텔링은 여러 가지로 유익하고 설득력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스토리텔링은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있어 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스토리텔링‘한다는 것 자체가 왜 진즉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말로 때늦은 후회를 갖게 만들 정도로 아주 바람직한 작업이다. 본래 <성경>의 <말씀>은 책에 따라 길거나 짧거나 하는 구전(口傳) 기간이 있었다. 말씀을 전달하는 구전자가 있었고, 구전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이 있었고, 청중이 모이는 절기나 예배 같은 계기가 있어서 말씀이 선포되었다. 인류문화사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매체가 다양하게 발전되면서 구전이 기록(記錄) 전승으로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두루마리나 코덱스(Codex) 모양의 사본(寫本)이 생기게 된다. 그때부터 “듣는 말씀”은 “읽는 말씀”이 된다.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사본은 책(冊)의 형태로 발전한다. 작금에 와서 <성경>은 책의 형태에서 전자본문(電子本文)으로, 모바일 본문으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매체의 변화는 <성경>의 <말씀>이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제 독자들은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1,000여 개 이상의 번역본 중 자기가 원하는 언어를 골라서 언제 어디에서나 성경을 찾아 읽을 수도 있고, 읽어주는 본문을 들을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성경>은 만화로, 영화로, 그림이나 조각으로 그 메시지가 시각화되기도 하고, 음악이나 무용으로 표현되어 시청각을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매체들과 비교해 볼 때,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 형태’로 아주 쉽게 성경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된 훌륭한 시도다.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성경 내용을 간추리거나 주요 내용을 발췌한 요약 성경이 아니다. 심지어 성경의 병행본문까지도 일절 생략함 없이 매장, 매절을 따라가면서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 성경의 메시지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확대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본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10번 읽는 것보다 스토리텔링 성경을 한번 정독하는 것이 훨씬 낫다. 실제로 성경의 문학적 장르 중에는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이야기가 메시지 전달에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설명할 때 자주 이야기 방식으로 가르치셨다.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앞서 감수자는 저자가 성경본문을 이야기로 풀어나감에 있어 본문의 분량이 2-4배 정도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성경을 소화하고 새김질함에 있어서 독자들은 누구나 이처럼 자기식의 이야기로 풀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독자에 따라서는, 독자 개인의 상상력의 용량에 따라, 2-4배가 아닌 5배, 10배, 50배로 이야기를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1955)의 역작 요셉과 그 형제들(창세기 29-50장)이라는 장편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전6권이 2,919 쪽이다. 확대된 분량이 무려 70배에 이른다. 이럼에도 양방향 대화가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전혀 지루함 없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제 독자들도 이와 똑같은 체험을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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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편을 감상하거나 공부할 때마다, 일차적으로 주석가들의 작업을 먼저 살피기는 하지만, 해설가들의 시편 본문 해설, 특히 설교자들의 시편 응용과 해석, 기독교 시인들의 작품에 반영된 시편 살피기를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설교자들은 주석을 보고 인용도 하지만, 주석가들이 설교자들의 시편 해석을 살피거나 설교를 인용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주석가들은 늘 학문의 세계에 갇혀있어서 그들의 학술적 논의는 일반 독자와 시편 본문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석을 충분히 활용하는 설교자들은 늘 청중과 독자 가까이에 있어서 그러한 설교자들의 시편 조명은 한국어 독자와 히브리 시인의 거리를 가깝게 하고, 시편 본문과 독자 사이의 소통도 역동적으로 만든다. 김기석의 『하늘에 닿은 사랑 -김기석의 시편 산책』을 가지고, 그를 따라, 그와 더불어 시편의 세계를 산책하다 보면, 히브리 시에 익숙해질 뿐 아니라, 시인과의 소통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찬양과 감사와 탄식과 예배와 기도도 함께 성숙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편 산책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시편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독자들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을 거닐고, 거기에 살면서 시편을 만난다. 그러기에 저자는 독자가 처한 현실을 예리하게 관찰한다. 저자의 그러한 작업이 저자 자신의 주관적 편견이 아님을 밝히는 여러 증인이 함께 등장한다. 그 증인들은 동서고금의 시인들과 학자들, 비평가들, 사상가들이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의외로 많은 인물을 저자에게서 소개받는 호강을 누린다. 저자의 폭넓은 독서의 결실을 독자가 함께 나누는 것은, 독자로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증인들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독자를 설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우리 문제 해결에 능숙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는 성경의 신비한 세계에 깊이 빠지는 감동을 체험한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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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독자들이 대화에 끼어들어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살피고, 자신들의 믿음을 살피고,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더 넓고 깊게 파악하고, 우리 교회와 사회가 함께 겪고 있는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다보면,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단계로 스스로 승화하는 체험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대화 상대자가 누구이든,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누구도 상대를 억압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고뇌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같은 문제로 고심하던 작가들이나 신앙인들의 의견을 그들의 작품(시, 소설, 미술, 기타 장르)을 통해서 듣다가 보면 대화는 어느새 상상도 못한 차원으로 옮겨진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이 대화에 스스로 참여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벧전 3:21)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확신까지 가지게 된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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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문학적 성격이 아포리즘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명상이 깊은 설교자 김민웅에게서는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압축한 짧은 글, 곧 금언, 격언, 잠언, 경구 따위를 쉽게 만난다. 그러면서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한 신학화 작업을 시도한다.
9.
  • 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습니다.
성경의 한 절도 생략함 없이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쓴 “확대판 성경” 스토리텔링 성경(성서원, 2018)이 출간되었다. 스토리텔링 성경은 이야기를 비롯해서 주석과 해설의 기능까지 함께 하느라, 본래의 성경본문보다 2-4배 정도 많은 분량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쉬운말 성경의 본문을 기준으로 해서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창 37-50장)는 그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200매다. 그런데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무려 500매로, 2.5배가 된다. 이처럼 분량이 늘어난 것은 스토리텔링 성경에서는 이야기꾼이 성경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뿐만 아니라, 본문을 읽은 뒤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해 말씀에 대한 자신의 응답을 고백적으로 진술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런 감동이 독자의 감동과 서로 만날 때, 독자는 삶이 한층 풍요로워지는 말씀 나눔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자기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면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크나큰 은총과 복 받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성경>이 읽고 이해하기에 난해하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출간된 성경주석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 책인가를 반증한다. 스토리텔링은 그러한 난해함을 해소하려는 참신하고도 재밌는 방법이다. 이른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스토리(story) +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이야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스토리텔링은 여러 가지로 유익하고 설득력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스토리텔링은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있어 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스토리텔링‘한다는 것 자체가 왜 진즉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말로 때늦은 후회를 갖게 만들 정도로 아주 바람직한 작업이다. 본래 <성경>의 <말씀>은 책에 따라 길거나 짧거나 하는 구전(口傳) 기간이 있었다. 말씀을 전달하는 구전자가 있었고, 구전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이 있었고, 청중이 모이는 절기나 예배 같은 계기가 있어서 말씀이 선포되었다. 인류문화사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매체가 다양하게 발전되면서 구전이 기록(記錄) 전승으로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두루마리나 코덱스(Codex) 모양의 사본(寫本)이 생기게 된다. 그때부터 “듣는 말씀”은 “읽는 말씀”이 된다.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사본은 책(冊)의 형태로 발전한다. 작금에 와서 <성경>은 책의 형태에서 전자본문(電子本文)으로, 모바일 본문으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매체의 변화는 <성경>의 <말씀>이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제 독자들은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1,000여 개 이상의 번역본 중 자기가 원하는 언어를 골라서 언제 어디에서나 성경을 찾아 읽을 수도 있고, 읽어주는 본문을 들을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성경>은 만화로, 영화로, 그림이나 조각으로 그 메시지가 시각화되기도 하고, 음악이나 무용으로 표현되어 시청각을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매체들과 비교해 볼 때,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 형태’로 아주 쉽게 성경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된 훌륭한 시도다.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은 성경 내용을 간추리거나 주요 내용을 발췌한 요약 성경이 아니다. 심지어 성경의 병행본문까지도 일절 생략함 없이 매장, 매절을 따라가면서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이야기로 풀어, 성경의 메시지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확대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본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10번 읽는 것보다 스토리텔링 성경을 한번 정독하는 것이 훨씬 낫다. 실제로 성경의 문학적 장르 중에는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이야기가 메시지 전달에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설명할 때 자주 이야기 방식으로 가르치셨다.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앞서 감수자는 저자가 성경본문을 이야기로 풀어나감에 있어 본문의 분량이 2-4배 정도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성경을 소화하고 새김질함에 있어서 독자들은 누구나 이처럼 자기식의 이야기로 풀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독자에 따라서는, 독자 개인의 상상력의 용량에 따라, 2-4배가 아닌 5배, 10배, 50배로 이야기를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1955)의 역작 요셉과 그 형제들(창세기 29-50장)이라는 장편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전6권이 2,919 쪽이다. 확대된 분량이 무려 70배에 이른다. 이럼에도 양방향 대화가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전혀 지루함 없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제 독자들도 이와 똑같은 체험을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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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365일 날숨과 들숨”을 가지고, 시간에 구애(拘礙)됨이 없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 시간예전(時間禮典)을 체험할 수 있다. 아침에 이 예전을 갖게 되면, 그 여운은 하루종일 남는다. 직장에서 점심 시간을 이용할 수도 있다. 시간이 은총으로 가득 차는 충만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 침대에서라면, 악몽 없는 은총(恩寵)과 휴식의 밤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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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안에 이미 스토리텔링이 있다 감사의 말 2018년에 창세기를 시작으로, 성서원이 스토리텔링 성경을 선보인 이래, 신약을 완간했고, 이제 구약의 예언서를 끝으로 성경전서 66권의 스토리텔링을 마무리하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집필자들과 편집진 여러분의 노고를 미리 위로하고, 감사를 드린다. 감수자는 스토리텔링 작가들이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두 책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애가의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하여, 이 두 책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와 읽기를 거들려고 한다. 예레미야서의 특징 1) 구술과 대필 예레미야서에 적힌 내용이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사이에 예언자 예레미야의 구술과 그의 서기 바룩의 대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다. 예레미야서를 완성하면서, 내용은 구술자의 것이고, 문체는 대필자의 것이라고 가늠할 수는 있으나 실제 구술과 대필의 다양한 과정을 고려한다면 구술자와 대필자의 참여 정도를 산술적으로 계산하기는 어렵다. 대필문학에서는 구술자와 대필자를 나누어 각각 서로 다른 기능을 구분하여 탐구하지 않는다. 구술자와 대필자는 혼연일체의 한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이전부터 구술을 받아 적어 작품으로 완성하는 대필자(代筆者, amanuensis)가 있었다. 예레미야나 바울이나 베드로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육화(肉化)된 말씀을 구술할 때 그것을 받아 기록문학으로 완성한 이들이 있었다.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서를 대필하였고(렘 36:4), 바울의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필하였고(롬 16:22), 베드로전서는 실루아노가 대필하였다(벧전 5:12a). 구술자와 대필자가 완성된 기록물에 각각 어느 정도의 공헌을 했는가 하는 것은 판단할 방법론적++++++++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내용은 주로 구술자의 것이고, 문학적 표현은 대필자에게 의존했을 것이라는 개략적 추측 이외에 더 추구할 방법이 없다. 2) 두루마리 분서(焚書) 사건 바룩이 예레미야의 지시를 따라 예레미야가 구술하고 자신이 대필한 두루마리를 성전에서 백성 앞에서 읽는다. 같은 두루마리를 바룩이 고관들 앞에서도 읽는다. 고관 중 한 사람, 여후디가 그 두루마리를 여호야김 왕과 왕 옆에 배석한 고관들 앞에서 읽을 때 여호야김 왕은 중간중간에 “그만, 그만! 방금 읽은 그 부분을 이리로 가져오라!”라고 명하면서 낭독을 중단시킨다. “여후디가 두루마리 책의 서너 편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왕은 서기관이 사용하는 작은 칼로 그 부분의 두루마리를 잘라내어 활활 불타고 있는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왕은 두루마리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스토리텔링, 렘 36:23) 3) 다시 기록된 예레미야서 두루마리 “예레미야야,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구해다가, 유다 왕 여호야김이 불태워 버린 첫 번째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었던 모든 말씀을 그대로 기록하여라.”(스토리텔링, 렘 36:28). “하나님의 명에 따라 예레미야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구해다가 바룩에게 주고, 네리야의 아들인 서기관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유다 왕 여호야김이 앞서 불태워 버렸던 그 두루마리 책의 모든 말씀을 다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처음 것에다 여러 말씀들을 더욱 많이 추가하여 기록하였다.”(스토리텔링, 렘 36:32) 4) 두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서가 여호야김 왕의 분서 사건 때문에 두 번 기록된 것 말고, 현존하는 예레미야서가 기원전 3세기 그리스어역 ‘셉투아진트’ 예레미야서(Jer-LXX)와 기원후 11세기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 예레미야서(Jer-MT), 이렇게 두 예레미야서가 있고, 둘 사이에 내용과 자료 배열과 분량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기원전 3세기 그리스어역 ‘셉투아진트’ 예레미야서의 히브리어 저본(底本, source text)과 현존하는 기원후 11세기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 예레미야서가 내용과 배열과 분량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예레미야서라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쿰란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사해사본 예레미야서 단편은 그리스어역 예레미야서의 저본과 같은 히브리어 저본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와 바룩 이후에 줄곧 본문이 확대된 히브리어 본문일 수 있다. 5) 두 예레미야서의 비교 그리스어 예레미야서(Jer-LXX)와 히브리어 예레미야서(Jer-MT)는 내용도 다르고, 자료 배열의 순서도 다르다. 내용의 차이를 보면, 그리스어역 예레미야서는 히브리어 예레미야서보다 짧다. 히브리어 예레미야서에는 그리스어역 예레미야서에 반영되지 않은 3,077개의 히브리어 낱말이 더 들어 있다. 자료 배열순서에서도 차이가 발견된다. 25장 13절 이후부터 두 본문이 서로 다르다.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이 히브리어 예레미야서에서는 책의 끝부분(46-51장)에 나오는데, 그리스어 번역 본문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이 책의 중간(25:13 이후)에 나온다. 그래서 이 두 서로 다른 예레미야서가 다 번역되어 둘 다 나란히 구약성경 안에 제시될 필요를 말하는 견해도 학계에서 논의된다. 예레미야 애가(哀歌)의 특징 1) 기원전 3세기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애가가 예레미야서 다음에 편집되어 있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이 편집을 따르고 있다. ‘애가(哀歌)’라고 하는 책 제목도 그리스어 번역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어 번역 서문에는 히브리어 애가에는 없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고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예레미야는 울면서 앉아 있었다. 그가 예루살렘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슬픈 시를 읊었다. 예레미야가 말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2) 기원후 11세기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에서 애가는 예언서에 편집되어 있지 않고, 성문서(聖文書)의 ‘다섯 두루마리’(룻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더) 안에 들어 있다. 책 제목도 ‘애가’가 아니라, ‘에이카’(“슬프다, 어찌하여”)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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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를 빚어가시는 하나님 40여 화폭이 한 책 안에 펼쳐져 있다. 세계 유명 화가들의 성경 명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독자는 호강을 넉넉히 누린다. 성경 본문이 일찍이 화가에게 녹아들었다. 그것이 화가의 상상력과 만나 저마다 독특한 구도와 색채로 재구성되었다. 시각화된 본문이 독자에 따라서는 청각을 거쳐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이 되기도 한다. 말씀을 화폭에 담는 작업을 한 이들을 저자 김기석 목사는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이라고 일컫는다. 평생 말씀에 사로잡혀 설교를 통해 청중과 독자를 신비한 성경의 세계로 안내해온 저자는 성경 독자들이 성경 본문에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화가의 작품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자신의 체험을 먼저 밝힌다. 저자는 성경 본문이 독자의 상상력에 따라 그 의미가 생명체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저자는 화가들마저 줄곧 반복해서 화법(畫法)을 달리하고 재료를 바꾸어 같은 본문, 같은 주제를 그린 경우가 있었음을 놓치지 않고 소개한다. ‘열린 책, 닫힌 독서’를 염려하는 저자만의 군걱정은 아니다. 우리 역시 같은 ‘토라(율법서)’를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삶을 산 예를 바리새파 사람들과 나사렛 예수에게서 본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람을 박해하고 죽이려 하는 삶을 사는가 하면, 안식일에도 병을 고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응수하셨다. 열린 말씀을 닫힌 법조문으로 읽어 스스로 말씀에 갇히는 닫힌 독서가 있는가 하면, 열린 성경 본문에서 해방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열린 독서가 있다. 저자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미술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7쪽)”이라고 말한다. 구약을 형성한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문인들이 전승시킨 작품이다. 유대교의 이 세 지도층은 대극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는 셋 중에서 어떤 한 전승을 택하거나 다른 전승을 배격하지 않았다. 기능이 다른 세 전승이 함께 있어야 완전한 경전이 된다고 판단했다. 같은 시기에 태어난 초기 기독교는 랍비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사도 서간과 계시록을 한데 묶어 결합했다. 유대교에서 가져온 히브리어 성경을 <구약전서>라고 부르고, 기독교가 수집하여 정경으로 만든 그리스어 성경을 <신약전서>라고 불렀다. 초기 기독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합본하여 <성경전서>라고 하는 경전을 갖기에 이르렀다. 예언자적 상상력이 없이는 이런 상이한 대극적 전승들이 한 경전으로 결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전체의 맥락과 본문 자체를 주목하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지지해주는 증빙구(證憑句) 같은 본문만을 선택하고, 급기야 그것을 지배적 본문으로 삼아, 나머지 본문을 해석하는 잣대로 활용한다면 성경의 신비한 세계는 삭막한 사막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들은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예술적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성경이 지닌 역동적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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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안에 이미 스토리텔링이 있다 스토리텔링 문어체 진술 방식인 논리적 진술이나 예언자의 독특한 예언 문체와 비교해, 독자가 더 흥미를 느끼고 이해하기 쉬운 전달방식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성서원의 스토리텔링 성경이었다. 그러나 시가 문학을 만나면서 시편과 같은 시, 아가와 같은 노래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닌 것을 스토리텔러들과 독자들이 함께 체험하였다. 이사야서 속의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성경 이사야서를 읽다가 이사야서 36-39장을 만났다. 본문 자체가 이미 스토리텔링이다. 삼전도(三田渡) 굴욕(屈辱)을 연상하게 하는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협박 이야기(사 36:1-22),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과 유다의 왕 히스기야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고, 주의 천사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 명을 전멸하고, 아시리아 왕 산헤립은 자식에게 살해당한다는 이야기(사 37:1-38), 히스기야 왕의 발병과 회복 사이에서 이사야의 중재 이야기(사 38:1-22), 유다 왕 히스기야가 바빌로니아의 왕 므로닥발라단이 보낸 사절단에게 국고(國庫)를 개방한 탓으로 유다의 국고가 털려 바빌론으로 옮겨질 것을 예언한 이야기(사 39:1-8) 등은 그 자체가 빼거나 더할 것이 없는 스토리텔링 자체의 모범이다. 고유명사의 현대화 성경에 나오는 인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를 현대화시킨다는 것은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인명이나 지명은 기존의 전통적 음역을 떠나 교과서의 것을 채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스토리텔링 성경 이사야서 자체가 기존의 ‘애굽’을 ‘이집트’로, ‘앗수르’를 ‘아시리아’로 현대화하였다면, ‘아람 말’, ‘아람 방언’ 같은 표현도 함께 ‘시리아 말’로 바꾸었더라면 독자들이 느끼는 혼돈이 적었을 것 같다(사 36:11). ‘유다 말’도 좀 더 현대화한다면, 언어학에서 언어를 분류하는 ‘히브리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다 말’이라는 것이 언어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유다인이 쓰는 말’을 가리키기 때문에 영어번역의 일반적 경향을 따라 ‘히브리어’라고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영어번역 성경 중에서 TEV, CEV, CJB, CSB, NIB, NIRV, NIV, NLT, TNIV 등이 ‘유다 말’ 대신, ‘히브리어’라고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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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다성악(多聲樂, Ployphony)이다 시편을 이야기하기에는 마당이 너무 좁다 시편은 구약성경의 율법서나 예언서에 비해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본문 내용을 다시 말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시편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이야기해 달라는 주문도 무리였고, 거기에 응답한 스토리텔러들의 응답도 무리였다. 그것은 시편 자체가 지닌 운문으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150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이야기 형식으로 말하는 것도 스토리텔러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편의 현재 형태의 책 부피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기준으로, 편수가 150편이나 되고, 절수가 2,527절이나 되는 방대한 책이다. 시편이 짧은 책이라면, 이를테면 15편 안팎의 시를 편집한 정도의 책이라면, 스토리텔러들은 마치 시인 자신이 독자의 시 이해를 돕기 위해 시작 여담을 하듯, 기꺼이 시인의 심정이 되어, 그런 시를 짓게 된 배경이나 동기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주제에 어떤 낱말이나 표현이나 문체를 선택한 사정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토리텔러에 따라서는 어떤 한 시편을 읽고 평설을 쓰듯 반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상되는 독자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50편이나 되는 시편에서 이런 스토리텔링을 하려면 편집기획 단계에서부터 미리 정해진 분량이나 방법을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이 총서에 이미 나와 있는 다른 스토리텔링 성경들과의 균형이 깨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스토리텔링 성경 시편이 최종 모습으로 나왔다. 어려운 작업을 무난하게 수행한 작가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시편을 소개하는 스토리텔러들 시편의 각 시가 지닌 내용 파악에 중점을 둔 것으로는 해설 성경이 있고, 더 전문적인 것으로서는 각종 주석이 있다. 그러나 시를 이야기로 말하는 성경은 아직은 생소하다.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말 스토리텔링 시편이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시편을 소개하는 개론 부분은 분량이 방대하고 설명이 상세하다. 대단히 학구적이다. 거의 주석이 다루는 내용과 분량에 가깝다. 이 정도면, 시편을 감상할 일반 독자들에게는 충분한 정보다. 해설과 묵상 시편 본문 제시에 이어 해설과 묵상이 나온다. 시의 구조, 시의 내용 요약, 본문의 역사적 배경, 시의 저작 연대 등이 제시되어 있다. 스토리텔러가 독자들과 만나는 마당은 여기까지다. 스토리텔러의 이야기를 다 듣고 시편 각 편의 시가 충분히 이해되었다면, 이제 독자는 스토리텔러에게 더 의존하지 말고, 독자적으로 개별 시편을 묵상하는 가운데, 각 시와의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에 따라서는 독자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아무런 감흥이 없는 그대로, 이런 시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들어갔을까를 물을 수도 있다. 혹시 독자 개인이 용납할 수 없는 편견이 묵상하는 시 속에 들어 있다면, 이게 가당키나 한가, 하며 도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계기 되어 성경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새롭게 들려 오는 말씀을 만날 수도 있다. 묵상이 그만큼 깊어지기 때문이다. 묵상을 위한 자료 예를 들어보자. 고라 자손의 시, 시편 47편 9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왕으로 즉위하는 신년 축제 즉위식 행사에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인 통치자들도 예루살렘으로 몰려온다(시 47:9a). 고라 자손의 노래는 이방인 통치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우리 주님의 백성이 되려고 다 함께 모였”(시 49:9b)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방 백성 통치자가 와 있는 행사 현장에서 찬양대가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 부르는 고라 자손의 노래 가사 중에는 세계 만백성을 폄하하는 내용이 있다. 3 주님께서는 만백성을 우리 발아래 엎드리게 하셨고 뭇 나라를 우리 발아래 무릎 꿇게 하셨도다. 4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 땅을 골라주셨으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야곱이 큰 영화를 입었도다. (시 47:3-4) 독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이 불편할 수도 있다. 신년 축제 행사에 참여한 외국 귀빈 왕들은 이스라엘에 항복한 패전국의 왕들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였으면 죄송해도 모자랄 판에 “그분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야곱이 큰 영화를 입었”(시 47:4b)다, 라고 노래하는 것은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 유랑하는 이웃 백성을 두고서는 못할 소리다. 성경 안에는 고라 자손의 이 소리 말고 다른 소리는 없는가? 있다. 예언자 이사야의 소리다.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물밀듯 몰려온다. 왜?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선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쉬운말성경, 사 2:3b). 세계가 이스라엘에 항복해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나라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셨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자기 칼을 두들겨 쳐서 보습을 만들고, 백성들마다 자기 창을 두들겨 쳐서 낫을 만들”었기(쉬운말성경, 사 2:4a) 때문에, 그래서 더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세계가 예루살렘으로 온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왕으로 등극하는 날은 심판의 날일 수도 있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마저 버리실 수 있는 날이다(사 2:6a). 성경은 다성악(多聲樂 Ployphony)이다. 성경 독자마다 서로 다른 소리를 듣고 응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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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피조물은 바로 예수를 입은 사람이다! 컴퓨터나 인터넷이 이제는 우리와 분리된 객체가 아니라, 우리가 입는 옷에, 장신구에, 드디어 우리의 피부에, 몸에 장착된다. 이 책에서 결국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새 피조물이 지닌 예수는 타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주님을 몸에 지닌다. "웨어러블 지저스"다! '영적성장의 지름길' 1, 2권이 여기까지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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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전도서,아가(箴傳雅)의 성(性)과 육체(肉體) 지혜문학의 저자 지혜문학은 어떤 사건의 전개나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를 묘사한 것이 아니어서 스토리텔링 감으로는 다루기가 결코 쉽지 않다. 스토리텔러는 『쉬운말 성경』(성서원, 2012)을 부분적으로 개정(改訂)하여 본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이라곤 하지만 본문을 문단별로 제시하고, 거기에 ‘해설과 성찰’을 첨가하였다. 이것이 핵심 부분이지만, 스토리텔링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본문 해설’이고, 본문과 만나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다. 잠전아 스토리텔러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설식으로 전개한다. 솔로몬이 어떻게 『잠언』과 『전도서』와 같은 지혜문학의 저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밝히는 스토리텔러는 기브온 산당 꿈이야기(왕상 3:1-15; 대하 1:3-12)와 스바 여왕의 솔로몬 방문(왕상 10:1-13; 대하 9:1-12)을 스토리텔링 식으로 소개한다. 이것은 지혜문학의 저자 솔로몬을 극적으로 설명한 효과적 시도로 평가를 받기에 넉넉하다. 잠전아 스토리텔러들의 여성을 보는 시각 감수자는 잠전아를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들의 여성관을 살폈다. 잠언에는 여러 타입의 여성이 등장한다. 주석가들이 다 같이 지적하듯이 잠언은 남성 중심 사회의 산물이다. 그런데도 의인화된 지혜, ‘호크마’는 문법적으로 여성이다. 의인화된 지혜는 여자로 등장한다. 그녀가 청중에게 자기 말을 듣도록 초청할 때는 여성 예언자와 같다. 특히 잠언 8장에서 지혜는 자신을 창조 이전에 제일 먼저 지음을 받은 존재로 소개한다. “주님께서 태초에 일을 시작하시기 전, 곧 세상 만물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소유(所有)하고 계셨다. 영원 전부터, 곧 까마득한 그 옛적에 땅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나는 주님 앞에 서 있었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나 존재하고 있었다. 산맥들이 솟아나기도 전에, 언덕들이 일어서기도 훨씬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스토리텔링성경 잠언 8:22-25). 개역에서는 지혜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주 만물을 창조한 ‘창조자(創造者)’로 자신을 소개한다(개역 잠 8:30). 우리의 스토리텔러는 “그때에 나는 주님 곁에서 그분의 일을 돕는 ‘창조(創造)의 장인(匠人)’이 되어 날마다 그분의 기쁨이 되었고, 나 역시 그분 앞에서 항상 즐거워하였다”(스토리텔링성경 잠언 8:30)라고 번역한다. 여기서 ‘나’는 히브리어 ‘호크마’ 곧 여성으로 의인화된 지혜다. 지혜 여성이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창조 사역을 담당하였다. 현숙할 뿐 아니라 유능하기까지 한 여성 잠언 31장 10절 이하에는 한 남편의 아내이며 자녀를 둔 어머니인 한 여성 곧 ‘현숙한 여인’이 소개되어 있다(12:4; 31:10-31). 비록 번역 본문에서는 ‘현숙한 여인’으로 소개되지만 스토리텔러는 해설에서 이 여인을 유능한 여인으로도 소개한다. 이 여성이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습이나 사업을 규모 있게 펼쳐나가는 것을 보면, 그녀는 현숙할 뿐만 아니라 유능한 사업가나 경영인의 역할을 맡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 ‘에솃 하일’이 현대의 여러 번역에서는 ‘현숙한 여인’(a virtuous woman)이 아니라 ‘유능한 여인’(an able woman)으로 번역된 까닭도 바로 히브리어 원문이 현재의 문맥에서 지닌 뜻을 충분히 반영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마시는 인간의 기쁨 “그러니 사람으로서는, 자신이 사는 날 동안 인생을 기쁘게 살면서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그렇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신이 수고하는 모든 일에 보람과 만족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인 것이다”(스토리텔링성경 전 3:12-13). 전도서의 핵심 구절이라기보다는 육체를 지닌 인간을 격려하는 말 중에 “착하게 살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 싶어서 뽑아본 것이다. 감수자는 스토리텔러들이 이 구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보고 싶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자칫 육체를 즐겁게 하는 쾌락주의(快樂主義), 향락주의(享樂主義)로 빠질 위험성이 없지 않지만 “착하게 산다”, “선을 행한다”가 안전장치다. 아가의 육체 찬가 스토리텔링성경 아가 4장 1-5절은 신랑이 신부의 몸을 감상하는 내용이다. 신부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짚는다. 눈, 머리털, 이[치아(齒牙)], 입술, 입, 볼, 목, 젖가슴을 칭찬한다. 아가 7장 1-5절은 신부의 친구들이 신부의 몸을 감상한다. 여기에서는 신부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짚는다. 발, 넓적다리, 배꼽, 허리, 젖가슴, 목, 눈, 코, 머리, 머리털을 칭찬한다. 아가 7장 6-9a절은 신랑이 다시 신부의 몸을 감상한다. 키, 유방, 코, 입을 칭찬한다. 아가의 스토리텔러는 노파심에서이긴 하겠지만 아가의 여체 찬양에 안전장치를 필요 이상으로 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어쨌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어떤 번역이나 주석보다도 잠전아의 깊은 속내를 가감 없이 들추어낸 스토리텔러들의 수고에 찬사를 보낸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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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설교, 특히 그의 구약 본문 설교는 유대교 회당에서 듣는 랍비들의 설교(‘미드라쉬’)로 회귀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에서는 늘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지의 중심이다. 율법과 복음의 독자적 선명성이 밝혀지기도 하고, 때로는 이 둘의 충돌을 보여주기도 한다. 설교에 따라서는 율법과 복음이 성경 안에서 지닌 기능적 역할이 함께 존중받는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늘 기승전(起承轉) 예수, 혹은 기승전(起承轉) 그리스도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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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개신교를 자성하는 글 들이다. 독자 친화적 글이다. 듣기 거북한 훈계도 아니고 따분한 설교는 더욱 아니다. 신변잡기도 아니고 현학적 신학 이론도 아니다. 자기 자랑, 남 욕도 없다. 한국사회에서 외면당하는 한국 기독교, 기독교 문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독자를 초청한다.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아끼고 기독교 문화를 변호하고 반성하고 걱정하는 글이면서도 애정이 깃들어 있기에 일반 기독교 독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기독교 독자가 아니라도 이 저서를 통해서 한 종교로서 기독교가 지닌 특징, 한국 근대사에서 기독교의 역할, 한국 교회의 좌절과 희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즐겨보는 영화나 드라마, 틈틈이 읽는 소설, 화가의 그림, 때로는 상업광고의 문구, 가수의 노래 가사에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해답 실마리를 찾아 독자와 함께 나눈다. 더불어 저자가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감상하고 평가하고 우리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솜씨는 기존 평론가의 경지를 웃돈다. 또한 영화나 미술, 대중예술을 통해서도 철학자나 사상가나 신학자 못지않게 인류가 겪는 역사적 곤경을 고발하고 해석하고 영향을 미치고 공헌하는지를 저자에게서 배울수 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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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블이 수사학비평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하여 밝혀낸 성서의 원초적 메시지들은 가부장제적 입장에서 본문을 읽어 오던 독자들에게는 거의 닫힌 본문이었고, 그러기에 그것은 수많은 성서 독자들이 망각하고 있던 메시지였다. 그러기에 나는 창세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가 밝힌 창조신학의 새로운 국면과 아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재발견된 룻기의 새로운 메시지와 그리고 성서를 보는 새로운 여성신학적 관점을 발견해 낸 성서의 메시지를 감히 “우리가 망각했던 성서의 심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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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 거하다》는 광야와 가나안의 상징을 하나님의 통치에 접목한 작품이다. 그는, 가나안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 계시는 곳, 그를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 가나안이고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며 우리 인생의 여정을 안내한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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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장정>을 보면서 천지창조 이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모르는 이 지구 행성에서 전개되는 말씀의 파노라마에 흠뻑 빠져들었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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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V. Brisco의 「홀만 바이블 아틀라스」Holman Bible Atlas를 번역하여 우리나라 성경 독자들 앞에 선물로 내놓은 도서출판 두란노의 헌신적 봉사에 먼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많아도, 상업상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일에 선뜻 참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란노에서 이 지도책을 출판하면서 우리에게 몇 가지 공헌한 것도 이 기회에 밝히고 싶다. 1) 우리말 번역 성경에 나오는 인지명 중에서 중 고등학교 교재에 나오는 것들은 현대적으로 음역을 한 것, 2) 팔레스타인과 고대근동 지리학, 고고학, 역사, 문학 등에 나오는 특수 용어를 새롭게 음역하거나 번역한 것, 3) 최신의 인쇄 기술을 도입하여 홀만 지도를 그대로 재생한 것들을 공헌으로 치하하고 싶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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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속의 신학 예수의 자기천명(自己闡明) I AM [WHO I AM]에 관한 신학적 상상 복음서를 연구하는 이들은 신약전서 첫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고 하고, 요한복음서를 제4복음서(第四福音書)라고 하여, 요한복음서가 지닌 차별성을 강조한다. 예수의 행적에 대한 관점이 첫 세 복음서는 비슷한 데 반해, 요한복음서는 독특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신약의 첫 세 복음서 안에 예수의 행적이 다 같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도 물론 같은 기록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가 요한복음서 안에서는 관점을 달리하여 변주된다. 우리의 스토리텔러가 이미 언급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화법을 맨 처음 히브리어로 들었던 청중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 당신이 하나님임을 연상케 하는 하나님의 이름 양식(樣式)을 예수가 과감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스토리텔러는 요한복음서를 이야기로 푸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예수의 이런 화법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우리 독자들이 스토리텔링에서도 신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한다.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면, 우리말 번역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신다(출 3:14a). 이것은 그리스어 칠십인역 '에고 에이미 호 온'("I am THE BEING")을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의 형식을 살려 번역하면, 현대 영어 번역에서 보듯이, 이 말은 "I AM WHO I AM"이다. "내가 바로 나"라는 말이다. 곧이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백성에게 당신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도 일러주신다. "'에흐예'(I AM)가 널 보냈다고 말하라"고(출 3:14b). '에흐예'는, 문법적 형식을 살려 번역하면, 현대 영어 번역에서 보듯이 "I AM"이다. 히브리어로 말하는 언중(言衆)치고, 누군들 일상 언어생활에서 '에흐예'(I am, "나는 ~이다")라는 말을 안 쓰겠는가? 그러나 요한복음서 기자는 여러 곳에서 예수가 자신의 정체(正體)를 드러내실 때마다, 청중이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이름 "I AM WHO I AM"을, 혹은 하나님의 이름 I AM을 연상하게 되는 표현을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I Am Who I Am, TEV)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개정, 요 8:24).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I Am Who I Am, TEV)인 줄을 알고"(개정, 요 8:28). "너희로 하여금 '내가 곧 나'(I Am Who I Am, TEV)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개정, 요 13:19). '내가 곧 나'(I Am Who I Am)라고 하는, 하나님 이름의 완전 형태 말고도, "'에흐예'(I AM)가 널 보냈다고 말하라"고(출 3:14b) 말씀하신 것에서 보듯이, 단축형 '에흐예'(I AM)도 하나님의 이름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 화자(話者)인 예수가 어떤 억양으로 '에흐예'(I AM)를 말하셨을지 자못 궁금하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I am the bread of life," TEV) (표준, 요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 ("I am the light of the world," TEV) (표준 요 8:12)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Before Avraham came into being, 'I AM'." CJB, NAB, NKJ; 'I Am', NLT, TEV) (개정, 요 8:58)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I am the gate for the sheep," TEV) (새번역, 요 10:7) "나는 선한 목자다" ("I am the good shepherd," TEV) (새번역, 요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TEV) (개정, 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TEV) (개정, 요 14:6) "나는 참포도나무요" ("I am the true vine," TEV) (개정, 요 15:1). 번역들은 "I am"이라고 했지만, 듣는 이들에 따라서는 "I am"이 하나님의 이름 "I AM"으로 들렸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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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박미섭 박사의 히브리어 문법 교재는 기존의 교재에 비해 몇 가지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나온 많은 다른 교재들과는 달리 히브리어 전공자가 저술한 교재라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독자들에게는 큰 안심과 자부심을 안겨줄 수 있는 요소이다. 둘째, 이 문법 교재가 성서 히브리어 문법을 매우 간략하고 분명하게 소개하면서도 성서 히브리어 공부에 필요한 문법적 요소들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저자가 우리 주변에서 만나기 어려운 히브리어의 발음 규칙들을 이스라엘인들의 발음법에 기초하여 자세히 설명해 준다는 점이다. 추천자가 판단하기로는, 박미섭 박사의 히브리어 발음이 정확한 예루살렘 표준발음이라는 점도 아울러 밝히고 싶다. 넷째, 이 책이 비록 히브리어 성서와 관련하여 그 기초 문법을 다루고는 있지만, 오늘날 히브리어 학자들의 히브리어 문법 연구 결과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도 그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이 문법서의 예문이나 연습 문제에 인용된 풍부한 성경 본문들은 히브리어 문법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이 문법 자체를 배우는 것에 있지 않고, 히브리어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있다는 점을 인식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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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날을 잡아 최종 편집원고를 읽었는데, 새벽부터 앉아 읽기 시작한 원고는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야 나는 여덟 시간 동안 한자리에 앉아 집중하여 정독했던 것에 스스로도 무척 놀랐다. 온종일 한 권의 책에 푹 빠졌던 것은 나의 뚝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각 작가들마다 들려주는 사별 이야기는 순간적으로 빨려들어 공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 이야기를 읽어 가는 동안 눈물 없이 지나갈 만한 대목을 자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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