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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악백년
-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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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과 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
이 책은 《중앙일보》(1974. 4. 19~5. 29)에 〈양악백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던 김영환이 쓴 회고를 엮은 것이다. 김영환은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정착했던 지역이었던 평양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교회와 선교사를 통해 서양음악을 접했다. 서양음악에 매혹되었던 김영환은 초기 일본 유학생으로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고 졸업한 뒤 연희전문에서 본격적인 음악교육에 몸을 담는다.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음악’을 소개하고 다양한 연주활동을 했으며 당시 해외의 연주가들을 초청해 공연을 개최하기도 한다. 그의 실질적인 주요한 이력은 음악교육에 있었지만, 이를 통해서 후속세대 생산에만 주력한 것은 아니었고 근대음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자비를 들여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에도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회고되고 있다. 예컨대 식민지 조선에서 청음하는 게 쉽지 않았던 그랜드피아노를 연희전문 등 재직한 학교에 기증함으로써 근대적 사운드의 깊이를 경험하는 데도 일조했다. 무엇보다 그는 음악 후배들을 적극 후원하고 지지했으며 그들의 음악적 좌표를 사회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분투한 ‘문화기획’자였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열고자 하는 열망을 생애 마지막까지 갖지만, 이 꿈은 자녀들이 살고 있었던 이국땅에서 영면함으로써 끝내 이루지 못한다. 그의 회고대로라면 적어도 식민지 조선에서 피아노는 일종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바이올린 소리가 각광을 받았던 터라 그 기회를 좀처럼 가질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바이올린의 소리는 노래가 없어도 당대의 정서와 곧장 연결될 수 있었다면, 피아노는 독립적인 악기라는 인식보다는 노래를 부르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인지되어 있었던 것으로 김영환에겐 회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피아노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얼마나 정교했는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검토해야 할 문제이긴 하나, 피아노 자체만으로 당대의 ‘청자’들과 ‘교통’할 수 있는 방식이 식민지 조선에 그리 폭넓게 조성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김영환의 회고에서 일본이나 유럽, 미국 유학자들이 피아노 전공보다 바이올린 전공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분석은 두 악기에 대한 김영환의 판단을 어느 정도 신뢰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 ‘피아노’란 어떤 것이었는지는 섬세하게 연구해야 할 사운드 테크놀로지일 것이다. 실제로 ‘귀신통’으로 간주되었던 피아노의 한반도 유입 역사가 ‘기원’에만 맞추어져, 한 지자체에서 축제를 개최했다가 그 기원이 다를 수 있음이 밝혀져 큰 소란이 일기도 했다. 만약 피아노가 개체적 완결성이 강조되었던 악기와 달리 다른 악기나 노래와 더불어서만 존재 의의를 확보하는 악기로 식민지 조선에서 이해되었다면, 피아노의 존재방식은 다른 음악가와의 결속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네트워크 악기로 간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김영환은 비록 피아노 독주회는 가질 수 없었지만, 교육과 문화기획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더욱 발휘했는지 모른다. 물론 피아노는 연습용으로라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고가의 악기였고 집안에 두기도 쉽지 않았던 터라, 전공은 물론이고 있다고 해도 단독으로만 쓰이기에는 아까운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피아노 독주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체 공연 구성의 일부이자 전체 음악공연의 반주자 자리에 반복해서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피아노 전공자의 운명은 문화기획자의 포지션에 서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간에 말이다. 홍난파와 함께 만들었던 <경성악우회>(1919)에서부터 이른 바 총독부 학무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조선문예회>(1937)와 <경성음악협회>(1938)에 이르기까지 서양음악의 보급에서 구성된 다양한 모임은 물론이고 총독부의 요구에 따른 관변단체 구성에서도 김영환이 놓여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에서 생성되는 근대적 사운드에는 좋든 싫든 김영환이 기입될 수밖에 없었고, ‘최초’라는 수식의 자리에선 이를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야 했던 그가 감당해야 하는 건, 한 둘이 아니었고 심지어 ‘시대’의 격랑으로부터 의탁할 곳도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회고가 나오지는 않지만, 김영환에게 식민지 시대를 건너가는 일은 그 혼자만의 일일 수는 없었다는 것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가령, 그는 교육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후속 세대들이 이러한 활동에서 받았을 영향과 파장은 사적인 이력에 한정해 볼 수 없다. 더군다나 음파가 미치는 속도와 범위는 레코드와 라디오, 실제로 이루어지는 연주가 다르다고 해도, 각각의 사운드를 식민지 조선 전체에 규정된 사운드스케이프로 밀어 넣도록 강요되는 시대적 조건에 부대낄 수밖에 없었다. 그간 그의 피아노와 이력이 ‘배경음’ 혹은 ‘후경화’된 음화로 새겨져야 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의 피아노 사운드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초의 피아니스트의 사운드 그리고 지배적 사운드스케이프와 일으킨 마찰이 어떤 것이었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후속 세대의 연구 과제일지 모른다. 지배적 사운드스케이프가 규정한 결들에 완전히 동화되었을지, 어떤 미묘한 ‘파열음’을 형성했을지 그도 아니면 지배적 사운드스케이프가 쾅쾅 울릴 때조차 배경음으로 존재하면서, 다음 스텝을 기다렸을지에 대한 모든 가능한 상상을 개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회고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개인의 기억과 평가, 진단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글쓰기 방식이다. 해방 이후 30여 년이 경과한 다음에 진술된 것이어서, 사실 자체로 평가하기는 힘들고 오히려 식민지를 경유한 지식인들의 역사 감각과 자신의 활동내력에 대한 자기진술이 나타난 방식으로 읽도록 요구되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김영환이 이 회고를 쓸 시기를 전후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회고담’ 쓰기는 한편으로는 해방 30여년의 기간 동안 일제 말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시기를 ‘암흑기’로 묻어버리려 하거나 독립투사로 이미지화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 등 복잡한 양상으로 왜곡과 굴절이 일어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적어도 김영환은 회고를 통해 자신을 미화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이미 말했듯이 일정 정도 조선인으로서 겪었던 고충이 과장되어 나타나기는 하지만, 대체로 정직하게 그의 경험과 이력을 담담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테면 그는 동경음악학교의 별칭인 우에노음악학교 출신자로서 갖는 자부심 때문인지, 총독 부인의 피아노 과외교사로 활동한 이력도 감추지 않는다. 즉 그는 자신의 활동이 갖는 ‘영향’이나 ‘의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드러내기 보다는 이를 오로지 ‘음악활동’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에노음악학교에 대한 자부심 자체도 숙고해야 할 대목이지만, 조선인 유학생들이 가지고 있었던 ‘근대음악’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를 이야기할 때 조선을 결핍과 미성숙한 영역으로 이미지화하는 논의를 자연스럽게 전개하는 등 식민지 유학파 지식인으로서 한계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달리 말해 일제 말기의 활동을 예외로 한다고 해도 그의 회고담 역시 순진하게 읽을 수는 없다. 그의 진술에 담긴 ‘행간’을 살피고 빈칸을 다듬어가는 일도 회고록 이후에 남은 근현대음악사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해방 이후 음악 혹은 문화사적 네트워크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복잡한 문화사의 흐름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공백을 다루는 것도 필요할 법하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회고는 뜻하지 않은 문화사적 탐구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광수와의 경험을 쓴 대목인데, 최초의 근대소설이라고 알려진 《무정》(1917)이 집필되는 한 시기에 김영환과 함께 하숙을 한 것으로 증언된다. 이 장편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삼랑진 장면은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되어왔는데, 먼저 수해를 당한 삼랑진 지역민을 위해 개최하는 ‘음악회’는 식민지적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계몽지식인의 과잉된 열정이 투사된 것으로 평가한다. 서양음악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전통적 음악에 근거해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기에 ‘음악회’로 수해 기금을 마련한다는 발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서양음악’이 근대의 예술의 상징으로 계몽적 이상이 실현되는데 있어서 음악이야말로 그 극점으로 이광수가 이해했으며 이 때문에 수해라는 재난(식민지)을 극복하는데 음악회가 도입되었다고 해석하는 방식이 있다. 다층적 해석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김영환의 증언이 소설을 더 음미하게 만드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 만든다. 만약 이광수의 소설이 김영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내용’이며 ‘서술 형식’이라면 이 소설은 ‘문화적 공동체’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달리 말해 이광수의 소설을 미학적으로 독해하는 것과 다른 방식의 이해 방식이 생성되는 셈이다. 이는 비단 소설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예술이나 예술가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사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영환의 회고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진술로써만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 시기의 문화적 교류와 네트워크 그리고 문화적 공동체 구성의 요소와 방식들을 연구할 수 있는 재료로도 읽을 수 있다. 평가가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말이다. 이념적, 민족적 프레임을 통해서 서둘러 진단하고 읽기를 그치지만 않는다면, 다층적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영환은 미국에 사는 작은 아들네 집으로 건너가지만, 친지들의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외롭게 이 세계로부터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가 말년에 미국에서 그의 사운드가 어딘가에 전달되기를 바라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애써 남겨둔 귀한 회고를 음미할 때, 어쩌면 그의 피아노가 일으키는 선율이 차분히 울릴 수 있을 터이다. 이 회고를 조금씩 읽는 것이 바로 그 첫 걸음일 터이다. 그가 미처 연주하지 않은 행간들을 읽고 나눌 때, 한국 근현대음악사의 밑천들이 더 드러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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