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1818년 포도주 산지로 유명한 독일 모젤 강변의 조용한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독실한 유대교 집안이었으나 고등 법원 관리였던 아버지 대에 공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이해와 타협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835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마르크스는 법학 공부를 위해 집에서 멀지 않은 본 대학에 진학하였지만 이듬해 아들의 현실적 장래를 고려한 아버지의 조언으로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옮겼다. 당시 베를린은 헤겔 철학의 소굴이었는데, 원래 봉건적 구체제를 타파하는 개혁적 성격을 띠고 있던 헤겔 철학은 위로부터의 개혁에 성공한 절대주의 국가였던 프러시아의 관변 철학으로 보수화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원래의 개혁적 철학으로 재해석하려는 급진적인 지식인 모임에 합류하였고 이것은 그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프러시아 정부에 의해 반체제 인사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만다. 공직으로의 진로가 봉쇄된 이후 마르크스는 반체제 언론 활동에 종사하다가 결국 프러시아 정부로부터 추방되어 1843년 파리로 망명하였다. 망명 생활이 이어지던 1848년 브뤼셀에서 그는 혁명을 만나고 그것이 그의 이후 생애를 결정지었다.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직접 목도한 그는 오랫동안 품어 오던 사회 변혁의 해답을 본격적으로 찾아나섰다. 1849년 마지막 망명지 런던에서 변혁의 열쇠를 부르주아 사회의 본질적 모순인 경제 문제로부터 찾았고 1867년 해답의 첫 번째 결과물인 『자본』 1권을 출판하였다. 그는 해답의 전모를 담은 방대한 집필 계획을 세웠지만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단지 일부만 초고로 남았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해답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평생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직접 구현하면서 살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사회 변혁에 대한 해답으로 요약된다. 그는 1848년 혁명의 봉기와 일시적인 성공, 그리고 매우 급작스러운 실패 등을 모두 목도한 그는 이들 문제의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찾아낸 해답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하나는 변혁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이며 대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는 1848년 혁명의 실패 원인을 변혁의 주관적 의지와 객관적 대상 사이의 불일치로 파악하고 양자를 일치시키는 원리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는 베를린 대학 시절 헤겔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하는 지식인 집단에서 이 철학적 원리를 다듬었다. 두 번째 요소는 혁명의 발발 원인과 관련된 것으로 대개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사상이다. 구체제로 불리던 절대주의의 모순에서 비롯된 1789년의 혁명에 반해 1848년의 혁명은 자본주의라는 경제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한 그는, 근대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바로 이 모순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1843년 파리 망명 시절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이런 생각을 발전시켰으나 이들에게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 해답은 그 스스로 찾아야만 했고 1849년 런던 망명 이후 경제학에서 찾아낸 답이 곧 그의 사상의 세 번째 요소이다. 그는 고전 경제학을 공부하여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모순을 찾아내었고 이 모순이 혁명의 지렛대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들 세 요소로 구성된 마르크스의 변혁 사상은 20세기 내내 ‘혁명의 교과서’로서 지구상의 많은 곳에서 실험에 옮겨져 일부에서는 성공을, 일부에서는 실패를 겪기도 했다. 최근 2008년 공황 이후 그의 사상적 진가가 재조명되면서 소위 ‘마르크스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마르크스 사상의 구성 요소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회 변혁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 변혁의 구조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변혁을 수행하려는 주체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변혁의 객관적인 대상이다. 그런데 만일 이들 두 요소가 일치한다면 세상은 이미 의지가 실현된 것이므로 변혁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변혁의 원리는 이들 두 요소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한다. 마르크스는 이들 두 요소의 관련을 ‘변증법’이라는 개념으로 헤겔의 철학 속에서 발견하였으나 그가 베를린 대학에 있던 당시 헤겔 철학은 의지가 현실에서 이미 실현된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즉 변혁의 필요성을 거부하고 현존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경향의 헤겔 해석을 비판하고 의지와 현실의 불일치를 변혁의 철학적 원리로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전자의 해석을 관념론으로, 자신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후자의 해석을 유물론으로 규정함으로써 변혁의 철학적 원리를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립하였다. 마르크스는 대체로 베를린 대학 시절부터 시작하여 프랑스로 망명하기까지 주로 이 작업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립 과정과 관련된 저작으로는 1843년 크로이츠나흐에서 작업했던 미완성 초고 『헤겔 법철학 비판』과 1845년에 시작하여 1847년까지 집필한 『도이치 이데올로기』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전자는 주로 헤겔의 정치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헤겔의 관념론적 경향을 유물론적 경향으로 재해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후자는 당시 헤겔의 해석을 둘러싼 갖가지 견해들을 논쟁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보다 세밀하게 정립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이 이처럼 정립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즉 의지와 현실이 불일치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불일치는 바로 변혁의 의지를 불러일으킨 현실의 모순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로 나아가야만 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는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물론 아직 경제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지 않은 시기였고 따라서 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철학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현실의 모순이 경제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철학적인 수준에서 주로 ‘소외’라는 개념으로 집약하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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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파리에서 시작된 마르크스의 망명은 그로 하여금 현실의 모순과 보다 구체적으로 맞닥뜨리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 이어 자본주의적 생산을 본격화하며 이로 인한 모순이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이미 1789년 혁명의 전통을 가진 프랑스에서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사회주의 사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마르크스는 이들 사상가와의 교류를 통해 모순의 실체가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이며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약 5년간 사회주의를 연구하였지만 거기에는 변혁의 해답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주의로는 단지 자본주의의 모순을 찾아내고 그것이 변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적시할 수 있을 뿐 변혁의 현실적인 수단은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런 한계를 정리한 것이 1847년에 출판된 『철학의 빈곤』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를 대표하던 프루동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거기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하였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한계가 당시 자본주의를 대표하던 부르주아 경제학의 체계를 넘어서지 못한 데서 비롯됨을 밝혀내었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가 실현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전제로 삼는 과학이며, 따라서 보수화된 헤겔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현실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변혁을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의지와 모순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경제학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오로지 새로운 경제학, 그것도 기존의 부르주아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경제학이어야만 했다. 물론 이런 새로운 경제학도 일단은 사회주의의 업적을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했다. 1848년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집필한 『공산당 선언』은 사회주의가 찾아낸 자본주의의 모순을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고 명확한 형태로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주의에서 결여되었던 새로운 경제학의 과제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었다. 새로운 경제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당시 부르주아 경제학의 본거지였던 영국으로 마르크스가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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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경제학 연구는 그의 변혁 사상의 마지막 요소가 앞의 두 요소와 결합하여 완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혁의 객관적 대상이 의지와 불일치하는 원인, 즉 현실의 독자적인 발전 법칙을 찾아내어 의지가 드디어 이 현실의 법칙과 결합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1949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작업에 착수하였고 그 최초의 열매는 1867년 『자본』 1권의 출판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마지막 요소의 작업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과일이 처음 꽃을 피운 다음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여물어 가면서 마침내 성숙한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방식은 그가 이미 변화의 원리로 파악했던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자본』은 크게 세 개의 초안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들 초안은 마르크스의 독자적인 경제학이 조금씩 모습을 완성해 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본』의 첫 번째 초안은 1857~1858년에 집필한 『경제학 비판 요강』이다. 그는 이 요강에서 경제학에 대한 자신의 방대한 집필 계획을 밝히고 있다. 일부만 초고로 남겨졌을 뿐 결국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이 첫 번째 초안은 경제학에 대한 그의 전체 구상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두 번째 초안은 1859년의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원제 『경제학 비판』) 1권이다. 이 책은 원래 초고로 집필했던 『경제학 비판 요강』을 여러 권으로 나누어 출판하기 위해 인쇄용 원고로 만든 첫 번째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 책은 1부만 출판되고 중단되어 버렸다. 세 번째 초안은 『1861~1863년 초고』이다. 이 초고는 앞서 1859년 『경제학 비판』의 속편과 『자본』 4권에 해당하는 『잉여 가치론』, 그리고 『자본』 3권에 대한 초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세 개의 초안을 토대로 마르크스는 『자본』 1권의 인쇄용 원고를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그러나 『자본』의 2권과 3권은 인쇄용 원고로 완성되지 못하고 나중에 엥겔스의 편집을 거쳐 비로소 출판되었다. 비록 완결하지는 못했지만 이들 초안과 출판 저작을 통해 마르크스는 이미 변혁의 세 번째 요소의 핵심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이 피할 수 없는 모순(공황)을 안고 있고, 이 모순의 해답이 바로 노동자들의 변혁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과학적인 구조로 논증함으로써 변혁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혔다. 이리하여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마르크스의 사상, ‘혁명의 교과서’는 완성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혁명의 교과서를 현실의 사례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기도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71년 파리 코뮌을 분석한 『프랑스 내전』으로, 그는 파리 코뮌의 성립과 패배 원인을 자신이 완성한 변혁의 요소들을 적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 책은 나중에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실패 원인을 설명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2013년 6월 유네스코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자본』 1권의 육필 원고를 인류의 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그가 남긴 ‘혁명의 교과서’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인정한 이성의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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