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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졌다는 것에 놀라는 날이 있다. 절대 회복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청신한 나뭇가지의 빛깔이 어느새 눈에 들어오는 날. 그토록 참혹한 상실을 겪고도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신이 만든 찬란한 빛깔 앞에서 울고 싶어'(163쪽)지는 날이면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109쪽)라고 묻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데뷔 후 12년 만에 출간된 백수린의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의 주인공 이해미는 그런 순간이면 사고로 잃은 언니에게 말을 건다. 1994년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언니가 사망한 후 엄마와 해미, 동생 해나는 폭격 맞은 마음을 안은 채 독일에서 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하는 법을 배운 소녀는 가족을 위해 이주 노동자로 독일에 간 친이모인 행자 이모, 자유로운 삶을 즐기기 위해 떠난 마리아 이모, 첫사랑을 잊지 못한 조용한 선자 이모 같은 파독간호사들의 너른 품에서 서서히 회복되었다. 뇌종양에 걸린 선자 이모가 찾던, 일기 속 첫사랑 K.H.를 추적하던 추리소설 같은 나날은 IMF로 급하게 독일을 떠나게 되며 또 잃어버렸다. 상실에 익숙해진 해미는 자신을 잘 숨기는 어른이 되었고, 이제 그 시절 아래에 감추어둔 것을 다시 만나려 한다.
어른이 된 해미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다시 읽으며 어린 해미가 그때는 미처 몰라봤던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란다. 루이제 린저의 문학작품부터 대학의 입시 제도 같은 지식, 상식, 규칙 같은 것들에 익숙해져일 수도 있고 삶을 소화할 수 있는 마음의 용량이 늘어서일 수도 있다. 슬픔의 터널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엔 어디서부터 빛이 시작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틀림없이 미래의 빛이 우리에게 도달할 것이다. 아직 그 믿음을 잃지 않은 슬프고 복된 사람들에게 선자 이모가 일기에 적어두었던 루이제 린저의 문장을 함께 건네고 싶다.
Alles ist noch unentschieden. Man kann werden, was man will.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