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의 '특이점' <고래> 천명관이 10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소설의 빌런으로 'AI'가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남산타워'가 세계인이 선망하는 장소로 떠오르는 이 시점. 천명관의 소설은 1950년대의 서울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선택해 우리가 너무 빨리 잊어버린 한 시절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전쟁과 이념이 할퀴고 간 자리에 어린 앵벌이들이 '도시의 유령'처럼 떠돌며 삶을 구걸하던 때로.
이 도시에 이런 시절이 있었다. 미국 본토에서 조선 최초로 학위를 따오신 '박사님'의 말씀을 잘 듣고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47쪽) 살 만한 세상이 온다고 가르치는 목사님의 말씀과 '구름탄'에 순종해 앵벌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주, 가여움과 울음소리와 노랫소리로 구걸을 한다. 그들은 얻어맞고 학대당하고 사기를 치며 오직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타고난 음감으로 엄마의 풍금소리에서 계명을 읽어내던 주인공 소년 '동이'는 연이의 죽은 할아버지가 쓰던 낡은 아코디언에 매혹되어 거리의 악사가 된다. 구슬프고 신명나게 팝송을 연주하는 소년은 미군부대의 화려한 조명에 홀려 점차 진정한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꿈을 꾸는 소년은 신화 속 인물처럼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게 될 것이다.
천명관의 소설은 보기드문 하드보일드다. 잔인한 일을 겪은 아이들은 기꺼이 잔인해져 삶을 감행한다. 몰아치는 이야기가 기차의 속도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오직 삶을 향해 돌진하던 그 지독함이 서로를 돌아보는 순간, 그들은 진정한 '삶'을 손에 쥐게 된다.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서 독자의 삶도 새로이 시작된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소설, 심장을 한껏 뜨겁게 하는 소설. 천명관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