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명랑 미스터리 '설자은 시리즈'가 돌아왔다. <시선으로부터,>의 예술가 가모장 심시선, <보건교사 안은영>의 피로하고 용감한 안은영에 이어 이번엔 당나라 유학파인 통일신라의 남장 탐정 설자은이다. 죽은 오빠의 신분을 대신 쓰는 설자은은 망국 백제 출신인 장인 목인곤을 식객으로 들여 금성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비상한 발상으로 해결한다. 시리즈의 첫 권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의 뒷부분에서 비로소 왕을 만난 설자은은 2권에서 '집사부' 대사로 임명되어 왕의 직속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지귀는 올 것이다. 얼룩져 부패해가는 금성을 처음으로 돌리기 위해, 훨훨 날아올 것이다!” (104쪽)
선덕여왕을 사모해 스스로를 태웠다는 '지귀'의 요설이 흥성흥성한 금성을 휩쓴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은 고금의 진리. 넓은 영토와 풍족한 삶을 누리는 이 태평성대에도 몰락의 기미가 스친다. '웃고 있지만 성정이 찬' 목인곤과 달리 '웃지 않지만 차지 않은' 설자은은 스스로의 사려깊음에 걸려넘어지면서도 자기답게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아이들과 연인이 불에 타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유, 하나하나의 귀한 삶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답을 찾기 위해 설자은은 불꽃을 쫓는다.
좋은 시리즈는 한동안의 삶을 또 기쁘게 한다. <듄: 파트 3>과 <위키드: 포 굿>을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설자은 시리즈 3편 『설자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를 기다려 본다. 다시 황금빛 금성으로, 정세랑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 소설 MD 김효선
이 책의 한 문장
“오늘 들어보니, 나리향은 세상이 사납게 굴어도 제가 택할 수 있는 일에는 싱그러운 사람이었더이다. 금성은 나리향 같은 이의 생기로 융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여차하면 고이기 쉬운 죽음의 기운을 푸성귀로 쓱쓱 닦아내던 이였을 거예요. 오래 복을 누렸어야 했는데, 어떤 더러운 도랑에 누워 썩을 자가…… 그러니 나리향의 생을 기리기 위해 우리라도 제대로 갈무리해줘야지. 택한 상대와 묻어주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야. 중한 일이야.”
눈이 소복이 내린 어느 겨울날, 아이는 혼자 밖으로 향한다. 눈 위에는 새 발자국만이 도장처럼 남아 있다. 새 발자국을 따라 걸으니 많은 새들이 놀다 간 놀이터도 발견한다. 새의 발자국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니 발자국 자체가 새처럼 보인다. 훨훨 날아오르는 아이는 그제야 친구도 만나 자유롭게 하늘을 비행한다. 가끔 먹구름이 끼고 번개가 쳐 무섭지만 용기를 내면 괜찮다. 그보다 더 큰 아이의 소망은 내일도 새처럼 날아오르는 것이다.
제2회 창비그림책상 응모작 586편 중 대상으로 선정된 이 책 <새처럼>은 "작품의 기호적 요소와 이미지의 어울림(심사평)"에 주목하여 거듭해 읽게 된다. 자유롭게 하늘을 비행하는 새는 자유를, 하얀 눈 위를 어지러이 흩트린 신발자국은 군홧발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냉혹한 현실에 자유를 빼앗긴 아이들이 떠오른다. 작가는 그런 아이들을 생각하며 새처럼 용감하고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기를 고대하며 이 그림책을 그렸다고 한다. 두려울 테지만 용감한 날갯짓으로 평화로운 일상이 그 아이들에게 깃들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 유아 MD 임이지
작가의 말
작은 눈송이 하나가 제 손바닥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 없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전쟁의 아픔을 손에 떨어진 눈송이처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아이들의 새하얀 세상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남기를 바랍니다. 하얀 눈 위의 아이들이 반갑다고 날갯짓을 하면, 우리도 다 같이 새처럼 날개를 펼쳐 날아 보아요.
의심 없이 지켜오던 사회의 규칙들이 삽시간에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보며 아연하고 불안하다. 그간 우리 모두가 합의해온 규칙은 무엇이었던가, 이 혼란한 날들에 맞는 새로운 규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책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규칙에 대한 질문을 본질적으로 파고든다. 세계적인 과학사학자 로레인 대스턴이 인간이 어떻게 규칙을 만들고 바꾸고 없애는지, 규칙은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탐구하며 인간의 세계에서 규칙이란 무엇인지를 분석했다.
그는 규칙을 세 가지 틀로 나눈다. 측정 및 계산의 도구로서의 규칙인 알고리즘, 따라야 할 모델로서의 규칙인 패러다임, 그리고 사회 통제를 규칙과 연결한 법이다. 그는 이 세 가지 범주 속에서 규칙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어 왔는지 살피며 규칙이 유연하거나 엄격해지게 하는 요인이나 규칙의 개념이 흔들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등의 질문들을 통해 개념을 공고히 다진다. 과학사학계의 거장인 저자의 대표작답게 과학적, 철학적 논의들과 일상에 맞닿은 이야기들이 잘 꿰어져서 어렵지 않게 잘 읽힌다.
어지러운 현실을 해석할 근거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조금 다른 방식의 접근이 되어줄 것 같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시의적이되 보편적인 내용으로서 사고의 기반이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 과학 MD 김경영
이 책의 한 문장
어떤 정의에 따르든, 예외를 선언할 권력은 현대 정치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누가 법을 변용하는 것을 넘어서 법을 파괴할 수 있는가?
오전 5시 30분. 피오르 해안의 작고 고요한 마을. 닐스 비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찾아 입고, 커피를 끓이고, 아침 식사를 마련한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면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탈 것이다. 일생 반복하며 이제는 습관처럼 굳어진 그 모든 일들이 끝나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닐스는 평생을 마을과 도시, 섬과 육지를 오가며 무수한 사람들을 배로 태워 날라 온 페리 운전수였다. 하지만 그의 이날의 승객은 조금 특별하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반려견 루나를 시작으로, 한때 닐스의 배를 탄 적이 있는, 그러나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이들이 차례로 배에 오른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닐스 역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를 스쳐 간 수많은 삶과 죽음들, 그리고 가운데 단단하게 자리 잡은 먼저 떠난 아내에 대한 기억. 그가 되돌아본 삶이란 그 모든 것의 총합이었다.
노르웨이 최고 권위의 브라게 문학상 2023년 수상작. 노르웨이 문학계의 거장 중 한 사람으로, 새로운 작품을 출간할 때마다 현지 문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프로데 그뤼텐의 10여 년 만의 장편 소설이다. 소설은 피오르 해안가 곳곳에서 서로 긴밀하게 또는 느슨하게 연결된 채 살아온 이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며 닐스의 배에 올랐던 이야기들, 그들 삶의 찬란했던 혹은 비루했던 순간들과 죽음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피오르의 바다로 나아가는 동시에, 시간을 거슬러 삶을 되짚어가는 닐스의 초현실적인 마지막 항해를 따라 먼바다에 이르는 사이에 독자들은 그 끝에서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경외로 가득한, 한 사람이 온 생을 통해 선명하게 남긴 사랑에 대한 이야기.
- 소설 MD 박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