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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024
  • 히든 포텐셜
    애덤 그랜트 (지은이), 홍지수 (옮긴이)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1월 성공을 이루는 숨은 잠재력의 과학

    위대함은 대개 타고나는 것이지 길러지는 게 아니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는 어린 나이부터 특정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는 신동·천재에 열광하고, 학창 시절 학업 성취가 우수한 학생들을 찬양한다. 위대한 인물에 대한 전기는 대부분 그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남다른 존재였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비범한 일화들은 그가 자라서 위대한 성취를 이룰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강변하는 듯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니, 다섯 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하거나, 열세 살에 처음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후 아홉 번 장원 급제하지 못한다면 커서도 대단한 성과를 내기는 어려운 것일까.

    우리는 타고난 재능에만 주목하고 집중한 나머지 뒤늦게 발견되고 길러질 수 있는 숨은 잠재력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한다. 그리고 이러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해 과소평가 되고 묻힌 이들에 대해 개인의 능력 부족과 노력의 실패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와튼스쿨 조직심리학과 교수 애덤 그랜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타고난 재능은 기회와 환경, 동기부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 누구나 자신 안에 ‘숨은 잠재력’을 발휘하여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된 출발과 성과 중심의 잣대가 실제로는 균등하지 않은 기회와 체제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후천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행동 유형인 ‘품성 기량’,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도움을 주는 ‘임시 구조물’을 설정하고 활용하는 방법, 그리고 과소평가 되어온 이들에게 열린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적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길을 말한다.

  • 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은이), 김태성 (옮긴이) | 민음사 | 2023년 12월 "타이완 양대 문학상 금장상, 금전상 수상작"

    타이완에서 음력 7월은 '귀신들의 달'이다. 이 기간에 사람들은 이사나 여행, 이직 등의 이동을 최대한 삼간다. 그중에서도 7월 한가운데의 15일 '중원절'은 귀문이 활짝 열려 귀신들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날로, 모든 가정에서 풍성한 제사상을 차려 떠도는 혼귀를 달랜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중원절의 한낮, 타이완 외딴 마을을 향한 기차에서 한 남자가 내린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의 그는 독일 교도소에서 살인죄로 형을 산 뒤 고향으로 돌아온 천씨 집안의 일곱째 아들 톈홍이다.

    한때 그는 새로운 삶을 꿈꿨다. 자기 자신에게서 고국과 가족을 삭제해버리는 꿈. 작가 초청 프로그램으로 주거지와 체재비를 지원받아 도망치듯 도착한 베를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고 사랑하는 이도 만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톈홍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고, 중원절을 맞은 이 집엔 산 자뿐 아니라 죽은 자들도 함께 자리한다. 죽은 자들은 기억 속에서 생을 부지하며 목소리를 가진다. 그렇게 폭력과 억압이 만연했던 1980년대의 타이완을 힘겹게 통과해야 했던 천씨 가족의 사연이 펼쳐진다. 황인찬 시인이 "귀신 들린 듯한 엄청난 흡입력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고 추천하며 함께 읽은 소설.

  • 네임 스티커
    황보나 (지은이) | 문학동네 | 2024년 1월 "제14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이름을 써넣은 네임 스티커를 화분에 붙이고 뭔가를 빌면 그게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민구, 은서는 믿을 수 없지만, 한편으로 아주 조금은 민구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민구는 정말 이상한 애니까. 하지만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챙기는 민구의 모습과 꽤 괜찮은 민구 외삼촌 '명두'를 만나면서, 민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러는 사이 새로운 관계들이 조금씩 은서의 세상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은서는 떨리는 손으로 두 개의 이름을 적어 민구에게 건네지만, 은서의 산뜻하지 않은 얼굴에 민구는 아무것도 빌 수 없게 되는데...

    <네임 스티커>는 중학생 은서와 민구가 서로의 결핍을 나란히 응시하며 괜찮지 않은 나날들을 괜찮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황보나 작가가 그려내는 서사적 재미와 매력있는 등장인물의 면면, 그리고 섬세하고 위트있는 문장들은 우리 청소년문학에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끝으로 작가의 말을 전한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산뜻하지 않음을 느낀다면 잠깐 멈춰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상처 없는 계절
    신유진 (지은이) | 마음산책 | 2024년 1월 "'읽고 옮기고 쓰는 사람' 신유진이 쌓아온 계절의 기록"

    에세이 <몽 카페>와 <창문 너머 어렴풋이>를 쓰고, 아니 에르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등 여러 프랑스 작품을 번역하며 다방면으로 이름을 알려온 신유진 작가가, 이번 신작에서는 찬찬히 다져온 글쓰기의 힘으로 조금 더 깊숙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빛도 바람도 없이 불편하게 지내야 했던 서울의 작은 자취방 시절, 불면과 무기력감에 빠져 지냈던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의 3년, 이국에서 보낸 문맹의 시간과 꿈을 놓았던 순간, 모든 것을 얻었으나 가장 소중한 단 하나를 단 한 번 잃었던 깊은 고통의 경험, 할머니로부터 못생겼네 소리를 내내 듣고 지냈던 유년 시절과 할머니를 향한 미움, 그리고 할머니와의 마지막 작별 인사.

    작가는 기억을 복기하며 과거의 상처들을 하나씩 현재로 불러내어 써 내려간다.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게 된 지금의 목소리로, 겹겹의 계절을 통과하며 단단하게 쌓아 올린 마음과 문장으로. "부서졌으나 아주 망가지지는 않겠다는 각오로, 상처 입었으나 병들어 죽지 않을 마음으로, 오래 가난하지 않을 희망으로." 작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채워온 계절의 문장들로 위로받는다.

2.62024
  • 남겨진 것들의 기록
    김새별, 전애원 (지은이) | 청림출판 | 2024년 1월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이라는 책으로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렸던 김새별, 전애원 저자가 7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겨진 슬픔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책 <남겨진 것들의 기록>이 출간되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의 죽음을 정리하는 유품정리사는 그 누구보다 안타깝고, 어둡고, 힘든 사연들을 매일 마주친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좌절하기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노력하고, 남은 이들의 연대를 요구한다. 삶과 죽음은 사실 한 끗 차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바쁜 일상을 살아가며 그 사실을 기어이 잊고 만다. 그리곤 나 자신의 마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잊은 채 그렇게 무언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야 만다. 이 책은 나 자신의 마음을 돌보고, 나아가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그 작은 실천을 말하고 있다. 잠시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는 따스한 나날이 되길 소망해본다.

  •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
    향문천 (지은이) | 김영사 | 2024년 2월 "향문천이 들려주는 역사언어학"

    17만 유튜버 향문천의 첫 저작. 오늘날의 한국어는 어디로부터 흘러와서 어떤 교류를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을까. 이 책은 언어의 교류와 소통에 초점을 두고 한국어의 역사를 살핀다. 한국어는 신라어의 후예일까? 한국어는 북방 민족의 언어로부터 어떤 차용어들을 받아들였을까? 우리 언어에 남은 일제의 잔재는 어떤 것일까? 장별로 이어지는 흥미로운 주제들이 역사언어학에 대한 감을 서서히 익히도록 돕는다.

    언어역사학이라는 왠지 문턱 높아 보이는 학문명과는 달리 책의 내용은 생각보다 쉽고 무엇보다 흥미롭게 읽힌다. 학술 연구서로만 머물러 있던 주제가 이렇게 소화하기 좋은 글과 구성으로 소개되었으니, 언어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적극적으로 들춰보기 좋은 교양서다.

  •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정보라 (지은이) | 래빗홀 | 2024년 1월 "<저주토끼> 정보라 자전적 연작 SF"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2023년 국내 작가 최초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가 정보라의 자전적 SF 연작.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전통적인 자전소설을 떠올리면 자전소설과 SF가 함께 놓일 수 있다는 게 쉽게 상상이 되진 않는다. 고등교육법, 일명 강사법 개정안을 앞두고 시위 중이던 대학강사인 '나'는 농성 천막 안에서 반년을 풍찬노숙중인 '위원장'이 천막에 나타난 문어를 삶아먹은 일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잡혀가게 된다. 이 문어는 이 '말'을 반복한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현재 정보라의 삶이 뿌리내린 포항과 죽도시장의 역사와 SF는 이렇게 버무려진다. 죽도시장에서 '도와주시오(Помогите)....'라고 호소하는 러시아 대게를 만나고, 구룡포 바다에 원자력발전소 폐수를 투기하는 일에 항의하다 '검은 덩어리'들과 마주치면서, 바다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다에 사는 생물에 대한 이야기로, 지구와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미사일이 무사히 바다로 떨어졌다는 기사를 보고 안심했던 나는, 이 소설을 읽고서야 비로소 바다생물들에겐 그 미사일이 얼마나 날벼락일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 원자력 오염수 방류, 핵실험 같은 소재를 넘나들며 정보라는 이 세계를 사랑하는 일은 곧 싸우는 일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속 사람들처럼 이 사람들은 심각한 와중에 엉뚱한 말을 하고, 멀미가 나 토를 하면서도 다시 일어서 싸운다. 잘못된 일을 앞에 두고 잘못됐다고 울 줄 아는, '열받으니까' 싸움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나를 끓이지 않아서 고마워요.'(53쪽)라고 말하는 러시아 대게 '예브게니'의 말줄임표 붙은 말투가(이 이름은 러시아 소설 속 파멸적인 운명을 앞에 두고 대책없이 고집이 센 인물의 이름처럼 들려서 한층 애처롭게 느껴진다.) 사랑스럽다. 우습고, 슬프고, 그래서 사랑스러운 이 세계를 정보라처럼 사랑하고 싶다.

  • 위기 탈출 도감
    스즈키 노리타케 (지은이), 권남희 (옮긴이) | 이아소 | 2024년 2월 "어떤 위기가 닥쳐도 문제없어!"

    신칸센 기관사를 거쳐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그림책 작가가 된, 독특한 이력의 스즈키 노리타케. <어떤 화장실이 좋아?>의 작가이기도 하다. 작가의 신작 <위기 탈출 도감>은 2023년 일본에서 가장 잘 팔린 책, 일본 MOE 그림책 대상 1위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최고의 화제 도서다.

    우유를 쏟았는데, 쏟은 우유를 처리하려다 컵을 쓰러뜨렸다거나, 껌을 씹다 삼켜버렸다거나, 바지 주머니에 물건을 넣은 채로 빨래를 돌리거나, 수거 통을 빼고 연필깎이를 돌렸거나,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졌거나.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위기의 순간들이다. 이 책은 그런 위기들, 위기에 위기를 더한 순간들,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 등을, 굉장히 귀여운 그림과 위트 넘치는 짤막짤막한 글로 소개한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유쾌한 책이다.

2.132024
  • 금단의 마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 | 재인 | 2024년 2월 히가시노 게이고 ‘탐정 갈릴레오’ 여덟 번째 이야기

    ‘탐정 갈릴레오’로도 불리는 데이토 대학 유가와 미나부 교수의 연구실에 어느 날 고등학교 후배 고시바 신고가 찾아온다. 고교 동아리 물리 연구회의 선후배 관계이기도 한 두 사람은, 신입 부원이 없어 존폐의 갈림길에 처한 동아리를 구하기 위해 신입 부원 유치를 위한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나 도움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유가와 교수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게 된 신고는 그가 속한 데이토 대학 기계공학과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반가운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신고는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을 자퇴하고 종적을 감춘다.

    1988년에 발표된 <탐정 갈릴레오>를 시작으로 장장 26년째 이어지면서 ‘가가 형사 시리즈’와 함께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8번째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형사도, 탐정도 아닌 유가와 미나부 교수는 친구이자 경시청 형사 구사나기의 요청으로 불가해한 사건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과학자다운 냉철함으로 구사나기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의 유가와 미나부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이자 후배를 위해 지금까지 보여준 면모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런 그를 두고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시리즈 최고의 갈릴레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 시차와 시대착오
    전하영 (지은이) | 문학동네 | 2024년 2월 "젊은작가상 대상, 전하영 첫 소설집"

    화려한 색감, 가차없는 전개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린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은 2024년 현재도 OTT에서 인기리에 소개되는 작품이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처를 품고 학교 선생님이 된 한 젊은 여자가 도난 사건을 해결하던 중 사소하고 불운한 사건 몇 개를 거듭하며 몰락해 못생긴 노파가 되어 쓸쓸한 결말을 맞는다는 이 영화는 어떤 여성에겐 슬래셔 영화보다 더 공포스럽다. 소설가 박민정의 추천의 글대로 누군가는 '언제나 돌연 혐오스런 마츠코의 독방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전하영의 소설 <영향>의 영화감독 준비생 '난희'도 이런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는 '마츠코'가 될 것 같은 운명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정신마저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85쪽)을 느낀다. 마츠코가 투신한 것은 사랑, 난희가 투신한 것은 예술(혹은 아름다운 그 무엇)이지만 나이 든 여자, 성적 매력을 잃은 여자가 된다는 것은 난희의 예술에도 공포이긴 매한가지다. 영화제에서 만난 남자 프로그래머조차 30대 비혼 여성인 난희에게 "그럼 이제 더 팔 게 없겠네요"(81쪽)라고 농담하는 것이 난희가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난희는 희미하게 따라 웃는다.)

    이 영화의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가 촬영 당시 강압적인 지시로 인해 주연배우 나카타니 미키와 심각한 수준의 갈등을 겪었다는 것, 협의되지 않은 노출 촬영에 항의하며 <갈증>에 출연한 여성 배우가 은퇴를 결정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 영화를 둘러싼 세계 자체가 전하영의 소설 한 편처럼 읽히기도 한다. 위선을 비추는 거울로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소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한 전하영이 드디어 첫 소설집을 세상에 내 놓았다. 영화를 편집하듯 쇼트를 이어붙인 이야기는 영화와 미술, 제임스 엘로이와 존 치버 같은 (남성) 소설가의 작업물을 소재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어른이 되지 못한 청년 예술가 여성은 어떻게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나. 쓰고 만드는 자아를 지닌 인간들, 미치더라도 흉하게 미치고 싶지 않은 자아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여자가 있었다. 내가 모르게. 무언가를 쓰고,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남쪽에서> 75쪽)

    이런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있음을 소개하고 싶다. 기억하고 따라 읽고 싶은 소설가의 첫 소설. 벌써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백휴 (지은이) | 나비클럽 | 2024년 1월 "추리소설 읽는 철학 수업"

    추리 소설과 어울리는 단어는 언제나 지성보다는 오락으로 여겨져 왔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을 써낸 작가들은 대중적 인기를 얻을지언정 작품을 통한 사유를 인정받진 못했다. 그러나 평생 추리소설로 철학 해온 저자 백휴는 통념에 단호히 반기를 든다. 인간이 새로운 사유를 통해 우리가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를 넓혀 나갈 수밖에 없는 한, 추리 소설 또한 기존의 사유를 전복하거나 보완하는 역할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 그리고 20여 년 간 치열하게 탐구해온 추리 소설의 철학을 이 책에 풀어 놓았다.

    에드거 앨런 포, 애거사 크리스티, 레이먼드 챈들러와 같은 전설적인 추리소설 작가부터 류성희, 황세연, 정유정 등 국내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작가까지, 책은 장마다 한 명의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작가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패턴이나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백휴는 참신하고도 치밀한 사유를 이어간다. 주목받지 않았던 주제, 기대되지 않아왔던 두 영역의 만남이라 앞선 연구가 거의 없는 현실에서 그는 자신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사유를 진전시켜내었다. 추리소설이, 품은 것에 비해 가치를 평가절하 당하는 현실에 억울함을 느껴온 이라면 이 흥미롭고도 전복적인 사유의 장을 해갈하듯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는가
    버지니아 사티어 (지은이), 강유리 (옮긴이)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12월 "아이를 키운다는 건 한 세계를 키우는 일이다"

    이 책은 세계적 가족 심리학자, 가족치료의 1인자 버지니아 사티어의 역작이자 누적 부수 100만 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다. 유수의 언론과 아동, 청소년 전문 교육자와 심리학자들이 극찬하였으며 1988년에 첫 출간된 이후 전 세계 15개국에 번역 및 출간, 오랫동안 아마존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켜온 전설적인 육아의 바이블로 통한다.

    온갖 변수가 충돌하는 육아의 세계에서 아이를 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했다면, 주관 없이 남을 따라 유행을 좇아 아이를 길렀다면, 아이에게 언제 자유를 주고 언제 통제를 해야 할지 명확히 구분할 줄 몰라 방황했다면, 이제 전 세계가 인정한 양육 불변의 법칙을 따라가 보자. 그 모든 문제에 버지니아 사티어는 해답을 가져다줄 수 있다.

2.162024
  • 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지은이) | 열림원 | 2024년 2월 "전 지구적 위기, 곤충사회에서 답을 찾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책은 그간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 사회생물학자로서 통섭적 연구의 토대를 마련한 최재천 교수의 강연들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출간됐다.
    슬기로운 사람의 라틴어인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어쩌면 멸망의 사람이라고 그 명칭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구상에 그동안 존재했던 그 모든 종들보다 더 파괴적이면서 자멸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 고갈 등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해있다. 우리는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 최재천 교수는 그 해답을 곤충사회에서 찾는다. 공생하고 협력하며, 인간은 물론 다른 생물종과도 밀접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가 되기를 그는 이 책에서 강권한다.
    입말로 되어 있어 편하게 읽히는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결코 편하지 않다. 인간의 생존뿐 아니라 우리가 진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게 한다. 마음이 개운치 않다.

  • 홀짝홀짝 호로록
    손소영 (지은이) | 창비 | 2024년 2월 "의성어와 의태어로만 구축된 다정한 웃음의 세계"

    뒤뚱뒤뚱 아기 오리, 총총 강아지가 먹을 것을 찾아 처음 보는 고양이가 머무는 집에 들어간다. 끔뻑끔뻑 잠에 취한 고양이는 눈앞에 놓인 먹거리에 혀를 쭉 내민다. 어라, 그런데 모르는 오리와 강아지가 같이 밥을 먹는다. 부글부글 화를 내려는 고양이 앞에 오리와 강아지는 오들오들 두근두근 어떻게 할지 모른다. 갑자기 만난 전혀 다른 이 셋은 어떻게 될까?

    우리 창작 그림책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그림책 작가의 창작 의욕을 북돋우고자 제정한 창비그림책상 1회 수상에 빛나는 <홀짝홀짝 호로록>. 이 책은 의성어와 의태어로만 구성되어 아무 말 없이도 감정이 생생하게 보이고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는 심사평과 추천사를 받았다. 귀엽고 조화로운 그림 덕에 책 속 의성어와 의태어의 의미를 유추하며 체득하기 안성맞춤이며 평화로운 일상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만족스러운 웃음을 자아낸다. 귓가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이는 다정한 그림책.

  •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프란츠 카프카 (지은이), 편영수 (옮긴이) | 민음사 | 2024년 2월 "사후 100주년에 만나는 시인 카프카"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소송> 중)

    카프카의 문장에선 음악이 느껴진다. 프란츠 카프카 사후 100주년을 맞아 시 116편과 드로잉 60개를 수록해 출간되는 카프카 시 전집. 한국카프카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 책의 번역자 편영수 명예교수는 '카프카가 “의도적으로 산문과 시를 서로 연결시키고 서로 침투시켰다.”고 말한다'고 말하며 카프카가 놓인 서재, 그 미로로 독자를 안내한다.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2부 <지옥의 가면을 쓰고 있다> 중)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 (<변신> 중)한 그레고르 잠자의 불안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할 현대인은 드물 것 같다. 1883년 태어나 1924년 사망한 카프카는 미리 살다간 현대인이다. 사무치는 불안을 표현한 혼란스러운 드로잉과 함께 시인 카프카처럼 '허위의 세계'로부터 '엄청난 여행'을 떠나 본다.

  • 나에게 들려주는 예쁜 말
    김종원 (지은이), 나래 (그림) | 상상아이 | 2024년 2월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채우는 '예쁜 말'"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순간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한다. 타인과 소통하며 '관계 맺는 방법', '대화하는 방법',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고, 책을 읽으며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하고, '올바른 언어 사용법'을 습득한다.

    인문학과 자녀교육 관련 도서를 수십 권 집필한 김종원 작가가 '김종원의 예쁜 말 시리즈'를 처음으로 선보이며 아이들에게 다정한 이야기를 건넨다. 작가는 예쁜 마음과 예쁜 말에서부터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여러 상황 속에서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차근차근 들려준다. 말이 어려운 아이들, 말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아기자기한 그림과 예쁜 말이 담긴 이 책이 좋은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2.202024
  • 커넥팅
    신수정 (지은이) | 김영사 | 2024년 2월 "‘일의 격’ 이후 펼쳐지는 일의 길"

    소셜미디어와 각종 매체에 일과 리더십의 본질과 현실을 균형 있게 통찰하는 글을 올려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저자 신수정이 <커넥팅>으로 돌아왔다. 전작 <일의 격>에서 일과 삶을 향한 가장 진실한 형태의 위로를 전했다면, 이번 신간에서는 커리어 관리와 구체적 실행법, 커리어를 강화하는 마인드셋과 태도를 전한다.

    계획하거나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자는 여섯 번의 커리어 변화 경험을 통해 다양한 문화와 환경을 접하며 회사에서 일하는 것의 본질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은 바뀌고, 기업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는 반면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시대에 자신의 커리어를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으로 '커리어 포트폴리오 전략'을 제안한다. 커리어 포트폴리오란 자신의 다양한 경험과 역량을 계발해 펼쳐놓고 어떤 커리어가 필요할 때마다 이를 유연하게 연결하고, 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방법론이 바로 '커넥팅(connecting)'이다. 저자 신수정이 쌓아온 통찰과 지혜를 고스란히 담은 커리어 교과서 <커넥팅>이 여러분의 커리어 계획과 실천에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 저자의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커리어란 목표를 성취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여정, 이 여정의 핵심은 연결(connecing)이다!"

  • 기회를 주세요
    알프 괴칼프 (지은이), 알렉산드라 파비아 (그림), 김배경 (옮긴이), 소이언 (해설) | 책속물고기 | 2024년 2월 "마음 복잡한 날. 그래, 그럴 수 있어!"

    매일매일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일 그런 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비는 수밖에요. 밖에 나가고 싶은데 비가 내려 울적할 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바락바락 소리치고 싶을 때, 진짜 열심히 했는데 선생님과 부모님이 몰라줬을 때, 학교에 가기 싫어질 때, 친구들과 다투게 될 때. 이처럼 아이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상황은 수도 없이 많을 거예요.

    따뜻한 푸른색을 입힌 일상의 그림들이 펼쳐지는 <기회를 주세요>는, 울적하고 속상한 날의 아이들에게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주며,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어떻겠냐고, 이미 벌어진 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자고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는 '나를 속상하게 한 것들', '내가 나에게 기회를 준 것들'의 목록을 써보는 페이지를 마련해 두었어요. 일상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커다랗고 특별한 게 아니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놓친 마음일 거예요. 푸른빛으로 가득한 이 책이 부글부글한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줄지도 몰라요.

  • 랑데부
    김선우 (지은이) | 흐름출판 | 2024년 2월 "화가 김선우, 이 세계를 따스하고 아름답게 건너는 이야기"

    일명 도도새 작가라고 불리며 스타벅스와의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나아트센터 최연소 개인전 전시 등으로 지금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 김선우가 본인의 예술 세계와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에서 풀어낸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잠시만 벗어나면 최근에서야 전업작가가 된 화가 김선우의 삶이 드러나고, 전시회라는 번잡한 작업에서 잠시 물러나 매일 일기를 쓰는 그의 일상이 보이고, 감각과 풍경을 사랑하는 그의 예술적 영감을 같이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솔직한 글귀가 실린 책은 이 자체로도 하나의 아름다운 작업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선물과도 같은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격정세계
    찬쉐 (지은이), 강영희 (옮긴이) | 은행나무 | 2024년 1월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 ‘중국의 카프카’ 찬쉐 최신작"

    ‘중국의 카프카’로 불리며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유력한 작가로 언급되는 소설가 찬쉐(殘雪)가 2022년 발표한 최신작. 지리멸렬해진 현대인의 삶에 문학과 사랑이 격정을 불러일으켜 구원이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작품이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전작들과 달리 서사의 뼈대가 그려지고 좀 더 현실적이다.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문학과 예술의 도시 멍청(夢城). 뒷골목 헌책방 거리 북클럽에 모인 사람들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상대를 ‘읽어내고자’ 전력을 다한다. 샤오쌍, 샤오마, 차오쯔, 한마, 헤이스, 페이, 리하이, 샤오웨, 이 아저씨.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글쓰기와 독서와 삶이 하나로 녹아든 공간에서 사랑의 대상을 읽어내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감정의 너울을 넘나든다. 그야말로 격정(激情)이다.

    책과 독서를 중심 소재로 하는만큼 40년간 소설을 써온 작가의 독창적인 문학관을 만날 수 있는 작품. 소설 속 주인공처럼 늘 옆에 두고 아무 부분이나 펼쳐 그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 뇌리를 관통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2.232024
  •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마틴 푸크너 (지은이), 허진 (옮긴이) | 어크로스 | 2024년 2월 "세계를 뒤흔든 인류 문화의 15가지 장면들"

    지구상의 생물들은 진화를 거쳐왔다. 그것은 몇십만 년, 심지어 몇백만 년 단위로 측정되는 무척 느린 과정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생물 가운데 오직 하나, 인간만은 생물학적 진화와 구분되는 또 하나의 진화 과정을 만들어냈다. 이 두 번째 진화는 유전자 변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정보와 기술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며 지식을 축적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도록 만들어주는 전파 과정이다. 이 축적과 저장, 공유의 과정은 늘 원만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단절되고 때로는 변형되며 왜곡되고 잊혔다가 긴 시간이 흘러 미미한 흔적만 간신히 다시 발견되어 새롭게 재탄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지혜를 담아 저장하고 공간과 시간을 넘어 공유하는 두 번째 진화에는 특별한 도구가 이용되는데, 우리는 이를 ‘문화’라고 부른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 문화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며, 각 시대의 인류는 최선의 도구를 찾기 위해 과거로 눈길을 돌려왔다.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한 그리스의 문화를 향유했고, 당나라는 인도의 종교인 불교를 수용했으며, 바그다드는 이슬람 이전의 지식을 집대성했다. 하버드대 마틴 푸크너 교수는 4천 년에 걸친 인류 문화의 15가지 이야기를 정리한다. 시대와 대륙을 초월한 각기 다른 개성의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 문화를 빌려오고 기존 문화와 혼합하며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자기 문화의 우수성을 내세우고 타지의 문화를 배척하는 국수주의의 시대. 책은 폐쇄된 세계에서 과연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지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 우리 할아버지
    앤서니 브라운 (지은이), 장미란 (옮긴이) | 웅진주니어 | 2024년 2월 "앤서니 브라운표 가족 이야기"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다. 장판이 노랗게 타들어간 오래된 그 집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에 있노라면 할아버지는 나와 동생들에게 만주에서 겪은 이야길 해주곤 하셨다. 물론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고 잠이 솔솔 와 꿈과 현실을 왔다 갔다 했지만. 할아버지는 고목나무처럼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켜온 듯이 우리 곁에 있었다. 젊은 시절의 모습이나 아빠의 아빠 같은 모습이라거나 하는 것들 보다 늘 낮잠을 주무시는 밤나무 아래 돗자리 위에 있을 것 같았다. 하얀 모시옷과 모자를 쓰고 장터에 나가는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이 책을 읽고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을 했다.

    그림책의 거장 앤서니 브라운이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형>, <넌 나의 우주야>를 통해 보여준 가족 이야기가 할아버지로 확장되었다. 작품 속 생김새, 성격, 옷차림도 모두 다른 할아버지가 등장하여 어린이들과 교류한다. 그 어린이들도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될 테다. 그때의 모습들은 또 어떨까? 각자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우고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지 이야기해보아도 즐거울 것이다.

  • 시원하게 도와주는 북극곰 센터
    황지영 (지은이), 박소연 (그림) | 북스그라운드 | 2024년 2월 "고민이 있다면, 북극곰 꽁이가 시원하게 도와드려요!"

    동물원에서 태어난 북극곰 꽁이는 무려 10년을 동물원에서 지냈다. 10년 동안 우리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몰래 연습한 결과, 사람 말뿐 아니라, 사육사들의 썰렁한 농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꽁이는 약간의 월급과 퇴직금을 받고 은퇴한 후, 북극행 비행기표를 마련하기 위해 '시원하게 도와주는 북극곰 센터'를 오픈한다.

    반장이 되고 싶지만 많은 친구들 앞에 선뜻 나설 용기가 없는 혜리, 좋아하는 친구 이름을 적은 황금 딱지를 꼭 손에 넣어야만 하는 태우, 정성으로 보살핀 아기 고양이 치타가 사라져 애타게 찾는 별이. 꽁이는 북극곰 센터에 고민 해결을 의뢰한 세 아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주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들을 돕기 위해 애쓴다. 썰렁한 농담으로 주변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꽁이의 '꽁꽁 파워'에 까르르 웃게 되고, 어설프면서도 엉뚱한 꽁이와 머리를 맞대어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응원하는 마음이 불끈 생긴다. 베스트셀러 <햇빛초 대나무 숲에 새 글이 올라왔습니다> <리얼 마래>의 작가 황지영이 새롭게 선보이는 이 작품의 매력에 아이도 어른도 깊이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 커먼즈란 무엇인가
    한디디 (지은이) | 빨간소금 | 2024년 2월 "자본주의를 넘어서 삶의 주권 탈환하기"

    상상해 보자, 소유와 교환, 화폐를 뺀 사회적 관계를. 사적 소유를 삶의 기본 토대로 삼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에게 이는 가장 어렵고 도발적인, 어쩌면 두렵기까지 한 요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이후엔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확연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커먼즈의 개념과 커먼즈 운동을 둘러싼 담론들, 그리고 한국 내 동시대 커먼즈 운동의 모습까지 망라하여 소개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는 이론과 의심해 본 적 없는 세계의 규칙들의 텅 빈 근거를 조목조목 짚으며 책은 현재의 경제, 정치 형태가 어째서 정답이자 진리가 아닌지, 커먼즈는 어째서 그저 이상이 아니라 단단한 현실이 될 수 있는지를 설파한다. 불안한 개인의 삶,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불평등, 붕괴되는 전 지구적 생태...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고 삶의 주권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커먼즈를 발견하고 재감각해야 한다. 이대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은 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서 안내하는 지도를 따라 움직이고 싶어지리라 믿는다.

    커먼즈라는 개념은 언뜻 낯설어 보이고 낯선 것은 늘 모종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새로운 세계에 발 들이는 이방인이 겁먹지 않도록 최대한 상냥하고 친절하되, 알아야 할 것을 놓치지 않도록 촘촘하고 빠삭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다정함과 성실함의 힘이 여실히 느껴지는 책이다. 입문서가 가져야 할 모든 미덕을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게 채웠다.

2.272024
  • 나는 행복한 푸바오 할부지입니다
    강철원(에버랜드 동물원) (지은이), 류정훈(에버랜드 커뮤니케이션 그룹) (사진) | 시공사 | 2024년 2월 "영원히 기억할게. 사랑해 푸바오."

    푸바오는 2020년 7월 20일 대한민국 최초의 자연 번식으로 태어난 자이언트 판다이다. 깔끔하기로 유명한 아빠 러바오와 사랑 많기로 유명한 엄마 아이바오 사이의 첫 새끼이며, 푸바오란 이름은 '행복을 주는 보물'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에버랜드 유튜브 채널을 통해 푸바오의 탄생부터, 성장,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푸바오는 에버랜드의 인기 스타이자 우리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판다가 되었다.

    이 책은 <아기 판다 푸바오> <푸바오, 매일매일 행복해> <푸바오, 언제나 사랑해>를 잇는 푸바오 에세이의 결정판으로 그간의 포토 에세이를 통해 다 전하지 못한 '푸바오 할부지' 강철원 사육사의 푸바오를 향한 러브 레터이자 이제 곧 푸바오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위로의 편지다.

    푸바오가 어디서든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하며, 푸바오가 우리에게 주었던 그간의 위로와 사랑을 다시 가득 담아 푸바오 가는 길에 함께 보낸다. "영원히 기억할게. 사랑해 푸바오."

  • 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조해진 (지은이) | 창비 | 2024년 2월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 원작"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방송작가인 '나'는 이니셜 하나를 붙잡고 무작정 벨기에로 갔다. 연길에서 만난 브로커에게 목숨 같은 돈을 지불하고 벨기에로 밀입국한 탈북인 난민 '로기완'의 사연, 시사잡지에서 본 그 사연에 이끌린 것이었다. 2007년 12월 4일 베를린발 버스에서 내려 브뤼셀 거리에 섰을 작고 마른 한 남자의 일기에 기록된 행적을, 호스텔과 유료 화장실로 이어지는 삶을 2010년 12월 정확히 따라 좇으며 작가는 그가 겪은 냉대와 외로움을 정확히 경험한다. '무시와 경멸, 그리고 자신을 향한 과장된 경계심과 불필요한 오해'(47쪽)를 하나씩 체험하는 동안 L은 그의 안에서 고유한 한 인간, 로기완이 된다.

    방송작가인 '나'는 얼굴에 종양이 있는 소녀 윤주를 가장 주목받는 시간대에 방송하기 위해 그의 사연의 방영을 늦췄다. 수술이 늦어지는 사이 윤주의 종양은 악성이 되었고, 그는 윤주의 수술에서 도망쳐 벨기에로 가서 로기완의 행적을 만났다. 너무 많은 사연과 사정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한 인간의 영혼에 접속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똑바로 직시해야 했다'(80쪽) 같은 서술에 실마리가 있다.

    2011년 첫 출간, 신동엽문학상 수상, KBS가 선정한 '우리 시대의 소설 50'에 선정되기도 한 조해진의 소설이 13년 만에 새롭게 단장해 2024년의 독자를 만나고자 한다. 소설에 시간이 쌓이는 동안 벽을 높이 세운 세계는 더욱 사나워졌다. '영원히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할 것'(151쪽)을 알면서도 그 길에 정확히, 괴로울만큼 진심으로 서보려 하는 조해진의 소설적 태도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더 구체적으로 슬퍼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할 것이다.

  • 투명 고양이 또또
    소휘 (지은이), 김수빈 (그림) | 책읽는곰 | 2024년 2월 "제1회 책읽는곰 어린이책 공모전 대상 수상작"

    책읽는곰 출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양서를 선보이고자 어린이책 공모전을 시작했다. 제1회 공모전 ‘장편 동화’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투명 고양이 또또>를 두고, 아동문학 평론가 김서정과 김지은, 동화 작가 이금이는, 각각 "따뜻한 문장과 깔끔한 전개", "어린이들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 "일상의 소소함이 주는 울림"을 작품의 강점으로 평했다.

    이 책은, 우주와 다나, 민재, 그리고 민재의 반려 강아지 럭키까지 합세하여, 길 위의 작고 여린 존재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귀여운 모험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저분하고, 하찮은 길 위의 고양이일 뿐이라는 말로 아이들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그런 아이들과 함께 작은 생명을 살뜰히 보살피는 어른들도 등장하여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양이와 강아지 등 반려동물을 주제로 하는 책은 장르를 막론하고 수없이 많다. 분명히 있는데 보이지는 않는 '투명 고양이'를 찾아나가는 독창적인 설정 안에서 우정과 약한 존재를 향한 관심, 아이와 어른의 화합을 잘 녹여낸 점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든다.

  • 눈물꽃 소년
    박노해 (지은이) | 느린걸음 | 2024년 2월 "지금의 박노해를 만든 어린 시절의 이야기"

    어린 시절 '평이'라고 불린 본명 박기평, 시인 박노해의 첫 자전수필. 남도의 작은 마을에서 할머니와 오일장을 함께 다니며 자라온 평이의 소박한 일상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세상의 서릿발을 맞기 전, 그러나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유년 시절을 다져온 평이, 박노해의 삶의 궤적을 잠시나마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따라가본다. 이 책은 "무슨 힘으로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나요?"에 대한 답이라고 박노해는 말한다.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미래, 한치 앞을 가늠하기 힘든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그의 희망의 메시지이자, 단정한 기도이다.

    책 전반에 실린 구수한 남도 사투리와 저자가 직접 그린 연필 그림도 책을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지난한 세월들을 견뎌온 박노해의 삶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움트는 그 순간들을 만끽하면서 다시 한번 이 생을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