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거든."
낯선 병실에서 눈을 뜬 순간, 오기의 인생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아내와 가족여행을 가던 중 벌어진 교통사고로 아내는 목숨을 잃었고, 오기 자신도 전신 불구가 되어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고 전 오기는 제법 유명한 교수였고, 정원을 갖춘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었다. 이제 오기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장모뿐이었다. 그렇게 오기는 장모와 함께 자신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와 스스로의 삶의 본질을 마주한다.
평온하게 이어지던 일상에도 불길한 기미는 이미 스며있었다. 위선과 시기, 무시와 속물성. 장모가 보관하던 도자기처럼 보이던 유골함. 아내가 심은 덩굴식물. 정원에서 나던 암모니아 냄새 같은 풍경들이 겹겹이 진실을 감싸고 있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오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장모는 속을 알 수 없다. 침묵의 한겹을 벗겨내 기억을 복원하는 순간, 한 가정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가 실은 한 인간의 위선에 관한 이야기였음을 알게 된다. 죽기 전 아내가 쓰던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의 내용조차도 알 수 없어 그 어떤 해명도 할 수 없는 오기. 그는 이제 집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채로, 스스로의 악덕이 만든 커다란 구멍을 두 눈을 뜨고 마주해야만 한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작가 편혜영 장편소설. 지금까지의 삶이 앞으로의 공포가 된다.
- 소설 MD 김효선 (2016.04.05)